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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영 Jul 31. 2022

익산 미륵사지 석탑

MARCH, 2017 / <GQ KOREA>

익산 미륵사지 석탑 네 면에는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은 완만한 초대장이다. 일반적인 석탑에는 계단이 없다. 7세기 백제, 미륵사지 석탑의 ‘기획자’는 이 탑을 일종의 건물로 봤다. 계단을 올라가면 문이 나오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탑 중앙 심주로부터 통로가 십자로 뚫려 있는 구조였다. 부처의 신성이 ‘사방으로 통하고 팔방으로 닿기’를 바랐다. 미륵사는 고구려의 정릉사, 신라의 황룡사와 더불어 삼국시대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 하나의 원院에 금당 하나와 탑 하나를 짝지어서 세 곳에 나란히 놓은 독특한 배치였고, 약 40미터(추정)의 목탑을 중심으로 양옆에 두 개의 약 27미터(추정), 9층(추정)에 이르는 석탑이 있었다. 오랫동안 구분 없이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이라고 통칭한 건 그중에서도 6층까지 남아 있는 서西탑이었다. 

미륵사지의 시간은 바닥에만 남겨진 가운데, 서탑만이 위태롭게 1천3백년을 버텼다. 크게는 17세기경(추정) 서탑의 서측 면이 어떤 요인에 의해 무너져내리자 대놓은 석축, 20세기 초 일제가 붕괴된 석재까지 덮는 콘크리트 마감을 더한 모습이 해체 직전의 서탑이었다.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18세기 편찬된 기행 시문 선집인 <와유록>에는 “장난삼아 서쪽에 두른 벽(석축으로 추정)으로 탑에 올라간 농부 세 사람이 농기구를 끼고 그 위에 누워 있다”는 묘사가 나온다. 낮잠을 자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머지않아 서탑의 중심에는 다다를 수 있을 전망이다. 서탑 보수정비 공사가 2017년 9월에 완료된다. 지난 1999년 해체 보수 결정이 내려지고 무려 17년 만이다. 전혀 기억나지 않겠지만 한국의 유선전화 지역번호가 아직 네 자릿수이던 시절이었다. 

동탑은 이미 1993년에 완공된 바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에서 “완전히 시신 같은 건물”이라면서 “뽀얀 돌빛은 시체보다 더 창백한 빛깔로”, “반듯한 느낌의 예각은 싸늘한 날카로움으로”, “거대한 양괴감은 둔중한 느낌으로”, “정확한 비례감은 고지식한 면비례로” 변했다고 소리 높인 그 탑이었다. 29억이라는 예산도, 2년이라는 공사 기간도 빠듯했다. 예컨대 일일이 정으로 쪼아야 하는 화강암을 기계로 깎아내는 식으로 효율을 추구했다. 정치적 희생양이라거나 당시 정보, 기술의 한계였다는 등의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원래 효율은 모든 것을 부속물로 만들곤 한다. 제아무리 졸속이었대도 2년 만에 완공된 동탑에 비추어 서탑의 오랜 공사 기간은 이해받을 수 없었다. ‘세금 도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고, 전국적으로 비영리 문화재 발굴 재단에서 인건비를 조작한 사례가 발생하자 익산 지역 언론에서도 사업비 횡령 의혹을 제기했다. 2007년 10월, 검찰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사업단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수사 결과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깨끗해지기는커녕 상처만 덧났다. 처음부터 줄곧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사업단을 지키고 있는 직원은 막내로 시작한 김현용 학예연구사가 유일하다. “건축 쪽만 해도 그때 있던 직원 4~5명이 전부 그만뒀어요. 박봉에 열악한 현장을 감수하고 일해왔는데 이런 의심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다들 상상 이상으로 괴로워했죠. 다들 떳떳하니까 큰소리는 쳤지만, 검찰 조사가 두 번 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니까요. 저도 그만두려고 했는데 저마저 빠지면 업무가 마비될 것 같아서 새로운 사람이 올 때까지만 할 참이었어요. 그때 학예연구사 시험에 떨어졌다면 아마 그만뒀을 거예요.” 

효율은 조사助詞가 빠진 문장 같다. 조사가 주체, 대상, 방법, 장소, 시간을 특정하지 않을 때 보수정비라는 목적어는 망각되고, 주어 자리에 들어 있는 인간은 간과되며, 돌의 물성을 세밀하게 아는 일은 뒷전이 된다. 이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현용을 학예연구사에 합격시킨 감독관뿐만 아니라 1999년 서탑의 해체 보수를 결정한 문화재위원회가 있었다. “정확한 상태와 원형을 알 수 없으니 해체 조사부터 꼼꼼하게 하자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보수정비의 범위와 방향, 방법을 정하자는 원칙을 세우셨어요. 시작부터 상당히 좋은 그림을 그려놓으셨죠.” 

동탑은 효율이 아닌 오류로서 거울이 되었다. 그간 한국에서 벌어진 비극, 그러나 복원사의 중요 사례들 또한 거들었다. 복원된 광화문 현판, 숭례문 단청과 기둥에서 일어난 균열과 칠 벗겨짐 등이 문화재 복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을 바꿨다. 문화재 복원은 급하면 안 된다는 것. 2009년에는 뜻밖의 성과도 있었다. 심주석을 들어 올리자 안치되어 있던 사리장엄이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사리봉영기에는 미륵사 창건 연대(639년)와 주체, 성격이 적혀 있었다. 미륵사의 창건 설화처럼 알려졌던, <삼국유사> 수록 신라향가 ‘서동요’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부분은 역사가와 미술사학자들을 더욱 미궁에 빠뜨리기도 했다. (선화공주가 실재했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었다.) 백제 무령왕릉 발굴에 버금가는 발견으로 일컬어지는 사리장엄은, 서탑 해체 후 재조립과 함께 다시 봉안되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김현용은 서탑 복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점차 좋은 쪽으로 바뀌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탑 중앙 심주를 만지면서 그가 권했다. “부처님의 좋은 기운 받아가시죠.” 돌은 차가웠고, 그보다는 그의 기운을 받고 싶었다. 

서탑 조립은 현재 2층까지 이루어졌다. 장장 17년 동안 진행된 공사였고, 완공까지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인데도 그랬다. 해체, 조사, 발굴, 보강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을지 짐작이 간다. 해체 전 측량과 함께 3D 스캐닝을 실시하면서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사업의 닻이 올랐다. 석탑 보수정비 분야 최초의 시도였다. 해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 탑이 왜 무너졌는지를 규명하고, 재조립 전에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었다. 김현용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이 수리와 개축을 하면서 손을 탔기에, 그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에 붕괴 원인을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전제하고 말을 이었다. “미륵사지 석탑처럼 내부 공간 구성을 하는 건 목탑이에요. 판자처럼 얇고 넓은 돌을 켜켜이 쌓는 것도, 안허리와 귀솟음의 양식미도 목조 건축에서 온 것이고요. 하지만 돌은 융통성이 없는 재료예요. 조금만 균형이 안 맞으면 깨져버려요. 미륵사지 석탑은 외부와 내부의 돌이 분리된 구조이다 보니 약간 벌어지려는 성질이 있었고, 기초부의 돌이 상태나 형태가 제각각이어서 상부 하중을 균등하게 받지 못하고 있었어요. 목재는 썩으니까 관리하고 보수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석재는 그렇지 않잖아요? 하지만 석재도 산성비에 약하고, 생물이 기생하면 표면을 깎아먹어요. 내부의 적심에 있는 흙이 비와 함께 빠져나가면서 돌과 돌 사이에 공극이 생기면 치명적이고요.” 미륵사지 석탑의 미학적 가치는 목탑의 양식을 석탑에서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곧 내구성에 문제를 불러일으켰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천 년 넘게 유지되는 내구성의 문제라는 게 올바른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김현용은 이 사업이 복원이 아닌 보수정비라는 걸 힘주어 말했다. 복원은 ‘본래의 것으로 회복한다’는 것이고, 그보다는 정확한 한계를 아는 게 중요했다는 의미였다. “동탑은 9층으로 볼 수 있는 석재가 나왔다는데, 서탑 해체 과정에서는 7층 이상 나오지 않았어요. 층수는 물론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지 못하죠. 모르는 걸 복원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요. 추정으로 복원하지 않겠다는 기본 이념과 방침으로서 ‘보수정비’라고 한 거예요. 사실 보수정비조차도 훼손을 동반해요. 예컨대 흩어진 석재를 다시 세우려면 그 하나하나를 수집해서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데 손을 대는 순간 훼손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극단적인 예를 들면, 일제가 185톤의 콘크리트를 부어놓은 것보다 그걸 일일이 손으로 깼던 그들의 작업이 더 위험천만할 수 있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단의 효율은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창의력이었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에는 새로운 시도가 많다. 문화재 보수정비의 이상은 원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전통적인 방법만 고수할 수 없었다. 부서져서 그대로 쓸 수 없는 원부재를 보강재와 결합하는 기술을 고안했다. 티타늄 봉 여러 개로 두 부재를 연결했다. 실험을 통해 보강재 비율, 위치, 매입 길이, 피복 두께에 대한 과학적 기준을 마련하고 실행했다. 보강재의 경우 이전과 달리 색상, 면, 용암이 굳은 결의 방향까지 검증해서 썼다. 접착제는 변색이 빠른 에폭시 대신 화학 업체와 공동 개발한 석조문화재 보수 전용 에폭시를 썼다. 윗돌과 아랫돌의 접촉면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5퍼센트 미만이기에 완충재가 필수인데, 기존의 고운 흙은 비에 약했다. 천연광물, 모래, 황토를 섞은 무기재료를 개발했다. 비에 흙이 쓸리면서 공극이 생기는 일이 현저히 줄 것이다.

서탑은 6층까지의 외부 부재만 580여 개, 내부 적심까지 합치면 3천여 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아직 서탑 조립이 완료되지 않은 지금, 미륵사지 전체는 돌의 전시장처럼 보인다. 이 어마어마한 양의 부재도 부재지만, 새로운 기술을 더하고, 문화재라는 엄중한 대상에 걸맞은 과학적인 검증을 거치는 데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훌륭한 문학, 음악, 미술처럼, 창의적인 작업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리스, 이탈리아, 독일에서 기초적인 수준의 기술 전수를 받는 형편이었는데, 이제는 그들이 미륵사지 석탑을 참고하러 온다. 태국, 라오스 등 석조 건축물이 많은 아시아 지역에서도 협조 요청를 받는다.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하는 게 목표긴 했지만, 석조문화재 보존방법론의 방향성까지 제시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죠.” 김현용이 말했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현장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 중이다. 현장 인부에게 ‘사기꾼’이라면서 뭘 던지는 사람, 그만하라고 소리치는 숱한 사람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투명하게 한다”는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 미륵사지 석탑은 탑이자 사람이 드나들도록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금마, 지금의 익산 지역으로의 천도설, 그게 아니더라도 별궁이었던 지척의 고도리 왕궁평 유적으로 짐작하건대, 무왕이 미륵사를 왕권 강화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륵’ 부처는 불교의 기복신앙적 측면을 대표한다. 미륵사의 3원 구조는 미륵의 3회 설법에서 왔다고 본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자기 해탈을 추구하는 자력의 종교”지만, “인간이 해탈에 이르기는 너무 어려운 것이기에 그 타력적인 측면 또한 강조”되어 왔으며, “불교의 자력성과 타력성은 불교의 발달 과정에서, 또는 국가와 시대 상황에 따라 달랐다”고 미술사학자 이내옥은 <백제미의 발견>에 썼다. 신분도 천하고 선화공주를 만나고부터는 영웅적인 능력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서동이 왕이 되는 과정은 종교적 구원자에 의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즉 백제 불교의 타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종교적 구원자를 권력자와 겹치려는 시도는 새삼스러울 게 없다. 다만 미륵사지 석탑이 천 년을 버티고, 또다시 천 년을 바라보는 것은 누군가 나타나 대신하기를 바라기보다 스스로 움직인 사람들의 업적이었다.

“욕먹을 준비는 돼있습니다.” 김현용이 말했다. 서탑의 보수정비는 6층까지 이뤄질 예정이다. 추측하지 않아도 되는 높이에서 멈추는 것이고, 6층의 일부는 석재로 보완할 것이기에 아름답다는 평을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구조적인 하자는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원재료의 한계까지 극복할 수 있는 첨단 기술은 없다. 즉, 이미 많은 균열이 생긴 동탑처럼 안정화 과정에서 금이라도 간다면 사람들로부터 “헛돈 썼다” 소리 듣기 딱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당부하고 싶다. 완공 후 계단을 오르고 십자 통로를 지나 심주를 만져보기를. 분명히 차가울 테지만, 신성한 기운이 서려 있으며, 당신처럼 노동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탑이다.


사진| 정우영(고도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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