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gO 레고 Oct 28. 2022

날이 좋아 오늘은 자퇴

 마지막으로 무슨 글을 써야 하나 고민해보니 답은 하나였다. 자퇴를 하게 된 계기와 자퇴 이후의 이야기. 사람들에게 자퇴에 대해 말할 때는 쉽게 말해왔다. 학교 다닐 때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 '자퇴하고 싶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퇴는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자퇴를 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몇 번이고 고민하고 마음이 흔들렸다. 결심을 굳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퇴를 고민한 건 8학년 초였지만 자퇴를 한건 8학년 말이었으니 1년 남짓되는 시간을 고민했다. 아무튼, 이 글은 내 자퇴에 대한 이야기다.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코로나의 시작과 동시에 입학을 했다. 덕분에 많은 활동은 중단되었고 이 학교의 프로그램을 보고 입학한 나로서는 그 외의 다른 것에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꾸역꾸역 학교를 다닌 이유는 친구 때문이었다. 예리는 마음이 이미 떠난 학교의 끈을 끝까지 붙잡게 해 준 유일한 친구였다.  예리는 나와 나이는 같았지만 어린 친구였다. 예리는 항상 내 맘을 조리게 했다. 예컨대 예리는 전에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국어 맞춤법도, 곱셈도 잘하지 못했던 아이였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예리를 볼 때마다 내 마음속에 '엄마'와 같은 챙김의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심지어 예리가 앞으로 바르게 자라줬으면 하는 바람. 그것이 바로 예리가 가진 능력이었고, 나는 예리의 능력에 알맞게 부응했다. 하나둘씩 예리를 챙겨주다 보니, 내 맘에 뭐라 규정할 수 없는 편한 마음이 들었다. 예리 덕분에 나는 내가 남을 챙길 때 오히려 맘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예리도 날 챙겼다. 서로가 서로를 챙기고, 관심을 쏟게 되니 우리는 남들이 부르는 절친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대안학교의 피곤한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을 무렵의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갑작스럽게 자퇴를 권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쉽게 수긍이 되었다. 학교 프로그램을 다 하는 것도 아닌데 학비는 계속 나갔다. 게다가 머지않아 언니는 졸업을 하고, 나만 남게 된다. 톱니바퀴의 아귀가 딱딱 맞아가듯, 성남 근처에서 일을 하셨던 아빠는 오산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누가 봐도 이에 대한 답은 내가 대안학교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환경이 이러하다 해도, 만약 내가 계속 다니고 싶다고 우기면 부모님은 내가 하자는 쪽으로 밀어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자퇴 쪽으로 맘이 기울었다. 가는 데에만 2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를 매일 왕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때 얻을 수 있었던 자유보다 더 큰 자유도 얻고 싶었다. 그냥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어디든 좋으니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 



엄마가 자퇴를 권하기 전 나에게 제일 친한 친구가 전학을 갔고 나는 반에서 겉돌았다. 반에 모두와 친하기도 했고 그 친구들이 챙겨주려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그 무리에 낄 수 없었다. 다들 친절했지만 그 애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선이 느껴졌다. 친절하게 해 준다고 해도 내 사람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똑같았고 지루했다. 똑같은 날들이 지나던 어느 날 나를 즐겁게 해 준 친구들이 생겼다. 의미 없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친구들이었다. 마음도 없으면서 챙겨주는 거라 생각했던 친구들에게서 느껴졌던 선이 사라졌다. 그 선이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없어진 선이더라도 나에겐 선이 사라진 친구들이 간절했다. 나에겐 그 친구들밖에 없었고 그만큼 잡고 싶어 졌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의 선 안에 들어갔다. 학교를 다니고 싶은 이유가 생겨버렸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나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줄, 힘들 때 위로해주고 기쁠 때 같이 웃어줄 친구들이 생겼다. 그렇게 내가 다시 한번 자퇴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나는 자퇴를 할 때 친구들과의 연도 같이 끊기는 게 아니니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애들이 날 밀어주고 잡아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졸업만 하면 안 되냐며 섭섭해했다. 당연히 마음이 흔들렸다. 엄마는 다닐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마음을 굳히라고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지낸 일상은 내게 꿀같았고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일상에 난 왕복 5시간 거리를 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뜻을 꺾는 건 힘들었다. 부모님은 어떻게 해서든 나를 설득하려 했다. 내 뜻을 굽히고 부모님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정하고나니 내심 편하기도 했다



자퇴를 하기로 결정하니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생각의 기본 베이스가 '어차피 자퇴할 거니까'로 바뀌었다. 시험을 봐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나를 괴롭힌 친구들은 과감히 도려냈고 행동은 대담해졌다. 제일 많이 바뀐 건 아마 인간관계일 것이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져 학교를 탈출해 놀러 나가기도 했다. 아무도 날 말릴 수 없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내게 포식자가 없으면 마음놓고 나대는 하이에나라고 말했다. 멘토 선생님이 나를 보는 시선도 바뀌었다. 아무리 성적이 잘 나온다 해도 멘토 선생님 눈에 나는 그저 놀기만 해 상담이 필요한 애였다. 선생님께 자퇴 얘기를 했을 때 '네가 나가서도 이만큼이나 할 것 같니?'라고 하실 정도면 제대로 미움 산 게 뻔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선생님과 지낸 1년이 아까웠다. 그 선생님께 배웠다는 사실이, 그 선생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다행히 곧 방학이었다. 나는 몇몇의 친구들에게 자퇴 사실을 말했다.



시끌벅적 얘기를 나누던 친구들은 다 놀라 날 쳐다보았다. 친구들은 보고 싶을 때마다, 내가 넘어질 때마다 잡아준다며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울었다. 나는 친구들을 토닥여 주었다. 앞으로도 계속 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이 있어 마지막 날의 나는 자퇴를 후회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나를 버려두지만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 덕에 나는 끝까지 학교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평소라면 할 수 없는, 하지 않았을 일도 해보았다. 오전 수업만 하는 날 몰래 빠져나와 놀러 간다던가, 학교에 남아 야자를 핑계 대고 논다던가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날까지 시간이 금방 갔다. 서류상으로는 자퇴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교를 가는 건 마지막이었다. 그 학교 학생으로서의 시간은 이제 끝이었다. 



마지막 날은 친구들과 보냈다. 또라이, Y, 음침이, 소심이, 그리고 조장이까지. 우리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하지만 끼라고 권하면 싫어하는 조합이었다. 여자애들 중 나와 Y가 아니면 감당하지 못할 조합이었다. 같이 있으면 시끄러웠던, 자주 싸웠던, 그래서 어색해진다 해도 항상 모여 다니던 내 친구들. 하나밖에 없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12월 31일 우린 학교에서의 일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 또라이 집에 갔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각자 선물을 가져왔다.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말을 꾹꾹 눌러쓴 편지와 함께 우린 선물 교환을 했다. 잊어버리지 말고 서로를 기억하자는 의미였다. Y와 조장이가 울었다. 마지막까지 내 기분을 좋게 유지시켜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말이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나는 내 말에, 내 결심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내가 공식적으로 그 학교 학생이 아니게 된 날은 언니의 졸업식이었다. 졸업을 준비하는 학생들보다 먼저 들어가 나는 서류를 작성했다. 서류를 작성할 때 선생님의 미움이 서려있었다.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서류 작성을 마치고 밖에 나와보니 D가 있었다. D도 오빠의 졸업식에 따라왔나 보다. 나는 D와 팔짱을 끼고 지하에 있는 청어람 홀(지금은 소명홀로 바뀐 듯하다.)에 갔다. 그곳에 가니 한편에 졸업생들이 앉아있고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팸플릿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중 옆반 선생님도 계셨다. 옆반 선생님 중 한 분은 사진을 찍고 계셨고 한분은 뒤에 서계셨다. 졸업이라고는 한 번밖에 안 해봤지만 정말 재미없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재미없게 1부가 끝났다. 


2부가 시작하니 갑자기 노래가 나왔다. 첫 번째 노래는 옹달샘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요다. 아니 근데 왜 동요가 졸업식에서 나오지. 싶어 보니 졸업장 수여식과 사명선언문과 졸업 소감을 발표를 하기 위해 학생들이 입장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언니가 말해주길 입장할 때 나오는 곡은 신청곡이었다고 한다. 평범한 입장 곡도 있었지만 대부분 학생들의 입장곡이 정상은 아니었다. 우리 언니 같은 경우에는 박지윤의 <성인식>에 맞춰 춤을 추면서 입장을 했다. 졸업장 수여식이 끝나니 특별 공연이 있었다. 내 7학년 첫 예배 때 우리 학년이 특별공연으로 했던 노래가 나왔다. <우리가 노래하는 이유>라는 찬양이었다. 그 찬양을 들으니 우리가 특별공연을 준비하던 시간과 노력이 눈에 아른거렸다. 나와 예리가 손을 맞잡고 웃으며 워십을 연습하는 모습이. 예리가 빠져 예리 양 옆자리였던 나와 또라이가 손 닿지 말라고 짜증을 내며 옷깃을 살포시 잡고 워십을 연습하던 모습이. 부끄러워하면서도 끝까지 노력해 이뤄낸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마음이 이상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다들 사진을 찍었다. 할 게 없어 방황하던 나와 D는 복도에 나와 체육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D의 손에 이끌려 우리 교실로 올라갔다. 교실 문을 여니 흰 커튼이 휘날리고 있었다. 커튼 뒤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높은 산이 조화로웠다. 새하얀 구름이 하늘을 꾸며주고 있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우리 학교에서 보는 하늘이 참 예쁘다. 비 오는 날도, 눈 오는 날도. 맑은 날도. 항상 예뻤다. 이제 이 하늘을 보는 건 마지막일 것이다. 하늘 한편에 이륙하는 비행기가 보였다. 하늘이 맑아서인지 비행기도 당차 보였다. 창에 빛이 비쳐서인지 교실이 보였다. 텅 빈 교실이 하나, 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P가 잠자는 또라이의 뒤통수를 치고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또라이는 비몽사몽 한 상태로 일어나 P를 쫒았다.  배경이 농구장으로 바뀌더니 또라이가 화살로 바뀌었다. 화살은 곧바로 탕 소리를 내며 과녁에 맞았다. 탕 소리가 한번 더 나더니 농구장에 사람이 많아졌다. 남자 선배들과 친구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다시 탕 소리가 나더니 음침이가 골대에 공을 넣었다. '와아' 하는 소리가 나더니 매점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농구를 구경하던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음은 음악실이었다. 또라이가 기타를 치고 D와 U가 피아노를 치고 J가 드럼을 치고 있었다. 그 소리에 맞춰 나와 예리, 시끌이와 S, O, E가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에 맞춰 K와 Y, S가 춤을 추고 있었다. 배경이 음악실에서 소명홀로 바뀌더니 제이코어가 찬양을 불렀다. 그 노래에 맞춰 사람들은 박수치며 뛰었다. 앞에 있던 제이코어 워십팀이 앞으로 뛰어나오자 다시 화면이 전환되더니 체육대회날로 바뀌었다. 체육대회날은 비가 왔다. 점점 날이 좋아지더니 지금의 유리창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창문 한쪽에는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D의 '뭐해? 가자'라는 말에 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교실을 가로질러 나가 교실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1년 동안 지냈던 공간이 텅 비어있으니 위화감이 느껴졌다. 밀려오는 위화감에 문을 닫았다. 

이전 09화 화목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