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샵
우리는 몇 살이 되면 나이를 먹었다고 표현할까. '인생은 00살부터'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아마 '00'에는 20부터 많으면 90까지의 숫자를 넣어 '아직 우리는 젊기에 할 수 있는 건 많다!'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실제로 네이버에 방금 검색해 보니 '인생은 90부터'의 연관게시물이 있더라) 그렇다면 매 순간이 가장 젊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50,60살이 되어도 과연 나이가 많다고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기에 80,90살이신 어르신들이 보면 그들은 거의 자식뻘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30살에 가까워지기 시작한 내가 스스로 아저씨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바로 20대 초반의 친구와 대화할 때이다. 20대 초반에는 주변 사람들의 나이가 다 비슷했다. 지금은 오히려 나보다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많아도 20대 초반의 친구들은 주변에 아예 없다. 그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 아찔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딱 봐도 앳되보이는 소년 한 명이 수줍게 샵으로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Y. 그는 살집이 살짝 있었고 피부는 여드름 때문이지 볼이 조금 빨갰다. 머리는 역시나 덥수룩했다. 꼭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안내했다. "머리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제가 스타일을 바꾸고 싶은데 머리 손질을 할 줄 몰라서요. 추천 좀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는 새로운 변화를 원하는 것 같았다. 몇 장의 사진과 그의 평소 생활습관, 머리 손질 경험 유무 등을 파악한 뒤 커트를 시작했다.
상담이 끝나고 커트를 시작하면서 바버샵에 처음 오시는 분들에게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 있다. "바버샵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 이 질문 통해 그 사람의 대화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대화를 원하지 않거나 낯을 가리시는 분들의 대답은 평범하다. "그냥 근처 찾아보다가 있어서 왔어요." 조금 더 디테일하게는 "새로운 스타일 하고 싶은데 바버샵이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이 두 개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적극적이신 분들은 어떨까. 대답이 매우 자세하다. 본인이 어떤 일을 하는데 뭐가 불편해서 새로운 걸 해보고 싶다라던가. 무슨 일이 있는데 좀 더 단정히 보이고 싶어서 찾아보고 왔다는 등 그 대답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Y는 후자에 속하는 손님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재수를 했거든요. 이번에 수능이 끝나서요. 이제 좀 꾸미고 싶어서 머리 스타일 좀 바꿔보려고요."
그의 이야기가 조금 더 궁금해진 나머지 나도 그와 대화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재수하느라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가 시발점이었다. 그는 나에게 한 마디를 했는데 나는 몇 마디를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경험했던 것들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사실 나는 반수를 한 경험이 있다.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20살에 지방 4년제 대학에 입학해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 학기 만에 휴학을 했다. 그리고 재수학원으로 향했다. 한 학기라는 시간 동안 열심히 했지만 성적은 그대로였다. 그렇게 성적에 맞춰 서울에 있는 전문대에 입학했다. 의지만 넘쳐났을 뿐 영양가 없는 시간이었다. (최근에서야 어머니는 돌이켜보니 그때 그 돈이 무척이나 아까웠다 하셨다.) 그럼에도 그곳에서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고 있다. 재수가 끝난 그 시점의 불안함과 안도감. 동시에 대학생활에 대한 설렘 등.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수많은 감정들이 공존한다. 다행히 Y는 나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었다. 그럼에도 괜히 아찔했던 건 내가 너무 아는 척 한 건 아닌가 싶어서다. 단순히 먼저 경험했다는 이유로 더 많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상대방과 대화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르겠다. 침묵하고 귀를 기울인다면 '더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될 수 있겠구나.'생각했다.
그러고 나서도 Y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오랜만에 수능에 관련된 이야기, 고등학교 생활 등의 이야기 등을 들었다. 덕분에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Y는 이 날 머리를 하고 '여사친'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이에 대해 내가 다시 질문하니 그는 미래에 '여사친'이 아닌 '여친'으로 만나고 싶다고 수줍게 얘기했다. 쑥스러운 그의 표정에서 순수함이 느껴졌다.
2개월 정도가 흘렀을까. Y의 예약 알림이 오랜만에 울렸다. 그의 소식이 궁금했던 찰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어깨정도 오는 키의 여자가 같이 들어왔다. Y의 표정도 더 밝아보였다. 나는 조용히 물어봤다.
"그때 말씀했던 그..."
"네 맞아요."
그의 쑥스러운 그 표정은 여전했다. 그들은 커트하는 내내 서로를 몰래몰래 쳐다보면서 웃음 지었다. 그들의 사랑이 괜히 더 풋풋해 보여 나도 같이 몰래 미소 지었다. 마치 아저씨가 된 기분이었다. 그 밖에도 Y는 대학에도 합격했다고 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Y는 나를 어떻게 봤을까. 형처럼 보였을까, 아저씨처럼 보였을까, 아니면 삼촌? 뭐든 괜찮다. 그가 나와의 시간으로 인해 작은 즐거움이나 위로를 얻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30살, 50살 더 나이를 먹어도 더 많은 경험을 했다는 이유로 너무 '아는 척' 하지 않아야겠다. '인생은 00부터'라는 말처럼 매 순간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여야겠다. 그래야 또 다른 Y가 나에게 와도 너무 아저씨처럼 보이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