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이야. '나' 는 인정하지만.
2일 차. 가정폭력이 정신병의 원인인데 가족이 정신과 내원을 반대할 때
나는 꽤 일찍 내가 우울증이라는 걸 깨달았다. 열다섯 살 때였다. 일찍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무렵에는 자해도 많이 했고 유서도 썼다. 그리고 학교 주변의 높은 상가들 중 옥상이 열리는 곳을 하나하나 기억해 놓았다(그때엔 다들 소방법이 두렵지 않았는지 옥상 문을 잠가 놓은 곳이 많았다).
그리고 우울의 바다에서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 뗏목-몰두할 거리-을 만들었다. 내 뗏목은 책이었다. 책에 집중하면 우울의 바다에 표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 공부하는 것처럼 보여 잔소리를 피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공부는 재미없고 책은 재미있었으니까.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다가, 내가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는 환자라는 것을 알아냈다.
내 우울증의 시작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었다. 신체적인 폭력만을 의미하지는 않겠다. 내가 열다섯이 될 때까지 수많은 폭력이 있었다. 기억나는 것들을 조금 말해보겠다.
"네가 거지X끼냐? 남들이 널 어떻게 보겠어? 너 이상한 거 알고 있냐? 네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사람이 말을 똑바로 해야지. 누가 검은색 스타킹에 흰 양말을 신어? 개X끼, 썅X의X끼야."
욕이 끝난 뒤에는 리모컨으로도 맞아보고 플라스틱 탁자에도 맞아보고 목도 졸려봤다.
열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180에 90킬로그램이 나가는 사십 대 남성에게 지속적으로 구타당했다.
어떻게 정신이 안 나가고 배기겠는가?
기분 좋은 상태인 아버지에게 위와 같이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이상하게 들리니까."
실제로 이상한 사실이기에, 이상하게 들리는 게 당연했다. 엄마도 아버지가 이상한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에게 날 때리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나에게 부탁했다.
"결건아, 그러지 마. 네가 아빠한테 그냥 네. 하고 넘어가. 너는 말이 통하잖아. 너는 그럴 수 있잖아. 너네 아빠는 미친놈이지만 너는 정상이잖아."
많은 정신병원 의사들이 환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들었다.
"병원에 와야 될 사람들은 안 오고 그 사람들한테 당한 사람들이 온다."
나도 딱 그 꼴이었다.
정신병에 걸렸으면 병원에라도 일찍 갔으면 좋으련만.
내가 우울해했으나, 성적이 좋았고 성실하게 학원에 갔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우울증 환자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내가 학원 의자에 앉아서 자살에 대해 몇 차례나 생각하는지 엄마는 몰랐다.
가족 또한 남이다. 나 대신 시험을 쳐줄 수도 아파줄 수도 살아줄 수도 없다.
가족도 완전한 타인이다. 내 고통은 나만의 것이고 나만이 안다.
그래서 한 번은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던 도중 자해를 했다. 내가 얼마나 이곳에서-우울의 바다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알리려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발버둥 치고 있는지 알리려고. 구해 달라고, 구조해서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직접적으로 신체적인 손상을 일으켰다. 눈에 보이는 사건과 손상이었고 엄마도 이 광경을 보았다.
하지만 이 실재하는 상처도 나를 정신과에 내원시켜주지는 못했다. 엄마는 내가 책을 많이 읽고, 문창과에 진학을 희망하는 아이이기 때문에, 다소 충동적이고 예술적인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나중에 말하겠지만 정신병은 예술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상처가 깊지 않아서 119를 부를 필요도 없었다. 소득 없이 몸에 흉터만 하나 추가된 셈이었다. 엄마는 내 병을 부인하고 싶어 했다. 큰딸을 우울증 환자(정신병자)로 인정하는 일이 싫었으리라.
어쨌거나 다행히도 나는 자신에게 더 손상을 입히지 않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예술고등학교에 합격하여 자취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의 우울증은 급속도로 좋아졌다. 폭력의 원인인 아버지가 제거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가정폭력이 우울증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면 가족으로부터 독립하는 것만이 답이다. 절대 가족에게 집착하지 마라. 가족을 떠나는 일에 죄책감을 갖지도 말라고 전하고 싶다.
가족을 포함하여, 타인은 나의 감각을 알 수 없다. 우울의 바다에 표류하는 고통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나의 정신병과 그로 인한 통증에 대해 타인을 납득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통을 인정해달라고 가족에게 애원하지 마라. 병원에 가는 데에 경제적인 부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그러니까 병원비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면-내 병증을 가족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내가 정신병자가 맞는지 아닌지는 의사가 판단할 일이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그것은 한참 나중에 엄마가 나에게 울면서 사과했기 때문이다. 아프게 해서 미안하고, 병을 방치시켜서 미안하다고. 엄마는 아버지를 집에서 쫓아내 주었다. 그렇게 되는 데에 십 년이 걸렸다. 나는 마침내 소원을 이루었다. 더 이상 아버지를 보지도 듣지도 않게 되었다.
그는 한심한 사람이다. 마흔 중반에 열다섯 난 여자애를 때린 상종 못할 인간이다. 그와 우연찮게 같은 집에 사느라 힘들었을 뿐이다.
맞은 고통과 기억은 지워지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나아진다.
다시 원래 이야기인 예술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보자.
나는 치료를 받지 않은 채 너무 오랫동안 우울의 바다에 표류해 있었다. 때문에 가정폭력이 사라진 뒤에도 우울증이 완치되지 않았다. 이미 병이 정신의 곳곳에 퍼진 상태였다. 고등학생이라 성적에 대한 압박도 심했다.
합격과 자취의 기쁨도 잠시, 그렇게 다시 우울이 찾아왔다. 가위에 눌렸고 불면이 심해졌고 자해도 다시 시작했다.
우울하지 않을 때에도 '우울하지 않다'는 감각이 이상했다. 감정의 파도가 잠잠하면, 이렇게 편할 리가 없는데. 무언가 불행이 닥칠 거야.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안해졌고 곧 다시 우울해졌다.
우울의 바다가 원래 내가 있어야 마땅한 곳처럼 느껴졌다. 고향처럼 말이다.
아버지가 사라지더라도 이미 생긴 병증은 지울 수 없었다.
병원에 가지 않고 혼자 어떻게든 부러진 다리를 붙였는데, 완전히 잘못 붙은 꼴이었다. 나는 절뚝절뚝 걸어 다녔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달라지면 우울증이 낫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우울증은 사춘기 같은 것이 아니다.
모든 병과 같이 약을 먹고 치료해야 낫는다.
그리고 시간은 절대, 결코 약이 아니다.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약으로 우울증을 치료한 뒤인 스물두 살에야 나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때서야 마침내,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기 때문이다.
우울을 순간적으로나마 완전히 잊어버린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