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일 차에서 말했듯 나는 '정신병 안아키'로 컸다.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대부분의 청소년들 또한 나와 같은 이유로 내원을 못 하고 있으리라 추측된다. 부모님 없이 진료비를 감당할 경제적 능력이 아직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병원 갈 돈을 어떻게든 마련한 적이 있었다. 정신과 간호사가 전화를 받고, 내 나이를 듣더니 말했다.
"미성년자시면 부모님이랑 같이 오셔야 진료 가능해요."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나는 끊긴 화면에 비친 나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애초에 아버지에게 맞아서 우울증이 생겼다.
엄마는 내가 가정폭력으로 인해 우울증이 생긴 것을 부정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부모님이랑 오라니?
감기는 부모님 없이도 약을 주지 않는가? 내가 아픈데 내 고통과 부모님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청소년 우울증의 대부분이 가정폭력을 포함한 가정문제에서 비롯된다. 가정문제로 청소년 우울증이 생긴 경우 부모님에게 아예 우울증 상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모님과 함께 진료받아야 하는 정신과에 내원하기란 불가능하다.
가정문제로 정신병이 생긴 것이 아닐지라도 정신과 내원이 힘들다. 부모세대가 정신병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이 우울증 정도의 병으로 내원하여, 정신과 진료기록이 남는다는 것에 크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자식이 정신과 약을 복용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는 부모님도 있다.
자신의 병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부모님과 한 집에 사는데 어떻게 병이 금방 낫겠는가? 환자의 죄책감과 자괴감은 커지고 치료는 지지부진해진다. 상태가 특별히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부모님은 말한다.
"그 약들 다 쓸모없는 거 아닐까? 우리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정신력을 길러보자. 정신병원은 그만 다니고."
힘들게 내원하더라도 이렇게 치료가 중단되는 경우도 있다. 부모님과 함께 정신병 치료를 받기란 너무나 고된 일이다.
여기서는 청소년인데 정신과에 내원하지 못하는 경우를 이야기했다. 성인은돈을 마련해서 정신과에 초진을 보러 가는 방향으로 진행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하지만 성인도사정이 있어 내원이 어려울 때, 적어도 어떻게 버티면 되는지 기초적인 '우울증 응급처치법'을 알려주겠다.
내가 가장 애용했던 것은 사이버 1388 청소년상담센터였다. 자해충동, 자살충동이 들 때에 전화했다. 24시간지역무관 운영 중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전화하면 받는 상담사가 있다. 자기 파괴적인 생각이 들 때 타인과 대화하는 일은 무척 도움이 된다.
상담사와 전화하면서 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무엇 때문에 죽고 싶냐고요? 해결할 수 없는 일 때문에요. 무엇을 해결할 수 없냐고요? 라고 끊임없이 대답하다 보면 좀 피곤해진다. 흥분이 가라앉는다. 전화상담을 통해 타인과 대화가 되는 상태의 나, 이성적인 상태, 충동이 없는 상태의 나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상담센터가 그렇지만 1388에도 안 좋은 상담사가 있었다. 세 번 전화했는데 같은 세 번 다 같은 상담사가 받았었고, 나는 세 번 동안 변함없는 고통을 털어놓았다. 세 번째 전화에서 상담사가 짜증을 내면서 말했다.
"신고하면 되잖아요."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내게 일어나는 고통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해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거나, 1388에 전화를 걸어 마음을 털어놓고 진정하는 일밖에 없었다.
"신고를 못 하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몇 번 들어서 짜증 나고 답답한 건 이해하는데요, 직업이 상담사시잖아요. 그럼 들어주시는 것 정도는 해주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상담사가 무어라 더 말했고 나는 아무튼 알겠다고 하고 끊었다. 그날 밤엔 상담사에게 화가 나서 내 고통을 잠시나마 잊어버렸다. 아무튼 1388과의 전화는 내게 늘 도움을 주었다.
나쁜 상담사가 걸리든 좋은 상담사가 걸리든, 누군가와 대화하는 일이 혼자서 죽을까 말까 고민하는 일보다는 낫다. 그것만은 분명하니 당신이 만 9~24세 청소년이라면 전화하자.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청소년 보호자면 관련 상담이 가능하다.
만약 청소년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에 전화하자. 마찬가지로 24시간 상담이 가능하고 전국의 전화를 받는다.
내가 1388의 상담사로부터 들은 가장 좋은 정보는 보건소처럼 전국에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우리 지역의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우울증 검사 및상담을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마다 진행하는 일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약을 먹지 않는 선에서' 정신과적인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임은 확실하다. 129로 전화하면 정신건강복지센터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에 대한 상담도 가능하다.
위에 내가 말한 방법들은 '우울증 응급처치법' 임을 명확히 밝힌다. 결코 치료가 아니다. 치료는 병원에 내원해서 받는 것이 치료다.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피가 나오는 상처부위를 천으로 꽉 묶어놓은 상태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그 상태에서
"어? 이렇게 했더니 이제 괜찮네. 피도 멎었어. 병원에 가서 수술하지 않아도 되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숨을 번 이 틈을 타서 병원에 서둘러 달려가야 한다. 약을 처방받는 등의 전문적인 치료는 병원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도 결국에는 내원을 권유한다.
어쨌거나 청소년 시절의 나는 내원은 하지 못했다. 다만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상담사가 말했다.
"정말 힘들었겠어요."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울었다.
상담받기 전까지는 나 자신조차도 나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살아있기 때문에 마땅히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내가 잘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이것도 못 견디고 살기 어려워하는 걸까. 왜 가정 내에서 나만 이토록 힘들까. 그렇다면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나도 나 자신을 자해와 자학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 상담사가 정말 힘들었겠어요, 라고 말했을 때에야, 내가 힘든 게 맞는 일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 괴로움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고, 안심이 되었고, 힘들어도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상담을 통해 나의 고통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우울의 바다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어디에다든지도움을 구해야한다.
그것이 우울증 응급처치법의 1번이다.
도움을 구하면 마땅히 무엇인가, 누군가가 당신을 도울 것이다.
그렇게 믿어도 좋다.
나는 그렇게 도움을 구해, 지혈을 하여, 과다출혈을 막고, 한 숨 벌어, 살아남아 성인이 되었다.
만약 1388, 1393, 129,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아직 도움을 구할 힘이 없다면, 내가 조금 이야기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