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PI 다면적 인성검사로 본 폭력성의 이유
14일 차. 그러나 가정폭력범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보호자 신분으로 아버지를 정신과로 데려갔다.
다만 아버지가 너무 병원에 가는 것을 귀찮아한 탓에, 내가 늘 가던 병원이 아닌 집 앞에 새로 생긴 병원으로 갔다.
아버지가 상담을 마치고 나왔고, 보호자인 내가 들어갔다.
의사는 나에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물었다. 나는 아버지의 폭력적인 성향과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른 이력, 내가 아버지를 가위로 찍은 과정까지 이야기했다.
의사는 아버지에게 MMPI(미네소타 다면적 인성검사)를 제안하고 싶다고 말했다.
MMPI는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고 싶을 때 선택하는 가장 기본적인 검사 중 하나라고 한다.
나 또한 처음 지역 정신건강보건센터에서 상담받았을 때에 MMPI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나 스스로 내 상태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년 뒤에 내원하였을 때에는 나, 즉 환자 스스로 병증을 인지한 상태였다. 그래서 내 주치의는 따로 특별한 검사는 진행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와 달리 자신의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의사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아냈고 MMPI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나 또한 아버지가 MMPI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MMPI 검사지에는 500여 개가 넘는 질문이 있었고, 아버지가 이것에 성실히 응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나를 진짜 정신병자 취급하려는 거냐'며 노발대발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다.
의사는 내 걱정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가정에서 폭력사건이 일어난 상황이니, 어머님 아버님 두 분 다 검사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 될 것 같아요. 검사 결과는 가족상담하면서 같이 보자고 할게요. 이러면 다음 주 가족상담으로도 자연스럽게 연계가 가능하니까요."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날은 초진비와 MMPI 검사지 값을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검사지를 펼쳐보고는 중얼거렸다.
"뭐가 이렇게 많아?"
나는 무시하고 엄마에게도 검사지를 건네주었다.
며칠 뒤, 둘 다 검사지를 풀었고 나는 가족상담 전에 정신과에 검사지를 갖다 주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 급성 우울증이 온 동생을 제외한 가족 모두가 가족상담실에 모였다.
둥근 테이블에 나와 아버지, 엄마가 둘러앉았다. 의사는 화면 앞에 서서 MMPI에 관한 설명을 간단히 하고서 말했다.
"우선 부모님 두 분의 MMPI 검사 결과 그래프부터 같이 볼 거예요. 어머님부터 볼게요."
엄마의 그래프가 화면에 떴다. 의사가 그래프를 설명해주며 말했다.
"어머님은 높은 수치가 없고 고루 괜찮으세요. 딱히 집어 말할 부분이 없고요.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세요."
"그렇군요."
엄마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아버님 검사 결과를 보겠습니다."
아버지의 그래프는 파도처럼 들쭉날쭉했다.
"아까 어머님이랑 비교해봤을 때 확실히 차이가 보이시죠."
나와 엄마는 네, 하고 반응했지만 아버지는 어떤 응답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이었다.
"지금 가장 높은 것이 우울감입니다. 이 정도면 보통 우울증으로 진단을 내립니다. 아무래도 이 우울감 때문에 현재에 대한 만족도도 낮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프 결과를 분석해 보면 분노와 충동성도 강하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때문에 아무래도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꾸 감정 표출을 하시게 되는 게 있을 것 같고요."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맞아서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다만 이제-너무나 명확한 그래프와 수치가 눈앞에 있으니 아버지가 그 무엇도 부정하지 못하겠구나 싶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닌 것 같은데."
그때 상담실에 있던 모두가, 나를 포함해서 엄마는 물론 의사까지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팔짱을 끼고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말을 잃었던 이들 중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닌 것 같다니? 저기 그래프가 있잖아."
아버지가 반박했다.
"아니. 알겠는데. 내가 느낄 때 아니라고."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신이 어떻다고 느끼든 간에 저 수치들이-"
의사가 급히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지금 바로 가족상담으로 진행해 볼게요."
의사는 가족상담에 대한 안내와 가족상담에서 사용할 화법에 대해 설명했다.
"존댓말과 함께 '나 전달법'을 사용해 볼 거예요. 네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는 이렇게 될까 봐 어떤 감정을 느껴. 이런 식으로 해보시는 거예요.
그리고 상대방을 비난하지 말고, 감정을 제어하려고 노력해주셔야 해요. 상대방의 말을 들으시고, 소리치거나 욕설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실 거예요. 이해하셨죠?"
"네."
이번엔 나와 엄마 아버지 모두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상담이 제대로 풀릴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신의 정신건강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시작된 상담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버지는 이 상담의 전제,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눈앞에 그래프와 수치가 있고 결과를 분석한 전문의의 진단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폭력성도 충동도 우울도 없다고 믿었다.
그래도 가족상담이 시작되었으므로 나는 마음을 열고 시도해보기로 했다. 어쨌거나 아버지가 자신의 정신건강을 인지한다면 분명히 동생에게 사과할 것이라는 희망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당겨 앉았다. 불만스러운 표정의 아버지와 화를 진정시킨 엄마, 약간 초조해 보이는 의사가 보였다.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 해야 했다. 앞으로 아버지가 스스로 가족상담 테이블에 앉는 기적은 결코 없을 테니까. 이 기적을 끌고 가야만 했다.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말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