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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 테라피스트 깽이 Mar 17. 2024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되는 일

발전해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우리의 첫 만남은 부모였고, 부모님이 옆에 계시다는 것에 의심을 하지 않고 성장해 왔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성향과 그들의 품성보다는 그저 가족, 잔소리하는 사람, 가족부양을 해야 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해야 하는 사람, 감사한 사람들이 되어있다.

그 후에도 학교나 학원, 사회를 나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이제는 사람의 품성과 성격, 성향, 나와 맞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본받고 싶은 사람과 피해야 할 사람들을 선택하며 사귀게 된다.


 하지만 나 역시 어려서부터 성장해 오며 자연스럽게 마음까지 어른이 되지 못했고, 지금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안 되겠지만 옹졸한 생각이 드는 상황도, 무엇인가를 더 갖고 싶어 하고 더 먹고 싶어 하고 빼앗기기 싫고 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이겨내지 못할 때도 있다.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라도 밤이 되면 그 행동들이 어른스럽지 못했구나 하고 이불을 걷어차며 잠에 쉬이 빠져들지 못할 때도 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면, 오늘은 좀 더 어른스러운 하루를 보내보자며 마음을 다독여 본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 오늘 조금 더 노력하고 내일 조금 더 노력하다 보면 어른이 될 것이다. 그렇게 어른이 될 것이다. 하며 자신의 노력을 스스로 응원해 보곤 한다.


 타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지금 당장 나와 맞지 않고, 무례해서 더 이상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상대도 어제와는 조금 더 나은 오늘을 살고 싶지 않을까? 단지 그 노력의 시계의 속도가 나와는 다른 것이다. 나보다 빠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보다 느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도, 느리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도 없고 그저 시계가 아직 고장 나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은 아닐까 싶다.


 약간의 이해의 폭을 넓혀 보고 싶다. 참아주지 못할 만큼 힘든 상대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시계가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가능성'에 희망을 두고 상대를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다. 언젠간 함께 웃어나가며 앞으로의 발전을 서로 응원해 주는 것이다.


 물론 정말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금 이 시기에는 말이다. 그런 경우라면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인생, 괴로움보다 즐거운 일이 더 많아야 하기에 거리를 두고 그 사람의 발전을 조용히 응원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들 사이에 한참 <<손절>>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단어가 매우 가슴 아프게 다가왔는데, 보통 손절은 너무나도 친했던 사이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죽고 못 살 정도로 함께 우정반지니, 뭐니 하며 간이며 쓸개를 다 빼줄 것처럼 친했던 두 아이. 그랬던 아이들이 갑자기 별것도 아닌 이유로 '손절'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처음 이들이 너무나 친했을 때에도 나는 그 친밀도가 이상하게 생각이 되었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너무 서로 무리해서 맞추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각자의 개성을 좋아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무시한 채 함께 같은 것을 해야만 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았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같은 가방을 메고.... 그랬던 아이들이 갑자기 손절을 외치는 순간 모든 것을 다 다시 바꾸었다.


 아이라는 시기는 그저 어른이 되어가는 시기일 뿐이기에 아직 그렇다 할 성격이 형성되지 못했는데 그때의 맞지 않음을 간단하게 '손절'이라는 단어로 끊어내는 것.. 그리고 그들의 부모님들도 그것을 유도한다는 것이 의아스럽기도 했다. 물론 아이라 하더라도 친구 선택은 선택적이 되어야 하지만, 그저 한바탕 싸우고 다음날이면 언제 싸웠냐는 듯이 원래의 친구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던 시절에 살았던 나로서는 아이들 싸움에 어른이 개입하는 것 자체가 그리 달갑지는 않다. 그저 자신의 아이던 남의 아이던 이 아이들이 앞으로 좀 더 긍정적이고 발전을 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임을 이해하고 아이들에게도 상대아이를 '가능성이 있는 아이'로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다.


 오늘 읽은 <언어의 온도>의 '가능성의 동의어'부분은 어른으로서 부족한 부분, 사람을 보는 눈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일. 누군가가 나를 믿고 있고 잘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이 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더욱 노력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는지 알고 있기에 오늘은 내가 다른 이들의 가능성을 보려 노력하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되어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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