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랑켄슈타인.1994
내 머리에 저장된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가 원작과는 매우 다름을 알게 되었다. 내게 프랑켄슈타인은 볼트가 박혀 있는 무서운 외형을 가졌지만 어딘가 순수함이 느껴지는 바보 같은 괴물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마주한 그는 그저 바보 같고 둔한 괴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이름조차 가진 적 없는 생물체(creature)였으며 그를 만들어낸 이의 이름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이었다.
케네스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어머니는 동생 윌리엄을 낳던 중 죽게 된다. 이후 빅터는 생명에 대한 강박증을 안게 되며, 과학의 힘으로 죽음을 거부하고자 한다. 의대에 입학한 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빅터는 윌드만 교수를 만난다. 이론과 철학의 결을 같이 했던 그들은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며 시간을 보냈으나, 예방접종을 하던 윌드만은 거부하던 환자의 공격에 죽게 된다. 죽은 윌드만 교수의 연구자료를 훔쳐 다시 실험을 재기한 빅터는 죽은 사체와 인간의 뇌를 합쳐 크리쳐(creature)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흉측한 크리쳐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휩싸인 그는 자신의 연구 과정을 모두 비밀에 부치기로 결심한다.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 사이, 크리쳐는 눈을 뜬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시장에 나온 그는 흉측한 외형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콜레라 보균자로 의심받고 공격받는다. 공격을 피해 무작정 숲으로 도피한 그는 우연히 한 농가의 창고에 숨어들게 된다. 그곳에 사는 가족을 남몰래 돕던 크리쳐는 그의 도움에 기뻐하는 가족을 보며 행복해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빚쟁이가 농가에 찾아왔다. 빚쟁이에게서 할아버지와 아이를 구해낸 크리쳐에게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는 고마움을 표시한다. 외모에 대한 편견이 걷힌 채,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으나 그의 외모를 보고 놀란 가족은 그를 쫓아내고는 도망쳐버린다. 극도의 슬픔과 절망감을 안게 된 그는 연구실에서 가져 나온 연구일지를 살펴보고 진실을 알게 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에 사로잡힌 크리쳐는 그의 동생 윌리엄을 죽이고 빅터의 오랜 친구 저스틴 또한 공개처형을 당하게 만든다.
결국 빅터는 크리쳐를 마주하게 된다. 크리쳐는 빅터에게 자신의 근원과 책임에 대해 묻는다. 그리곤 요구한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도록 본인을 닮은 여성을 만들어 달라고. 빅터는 이를 받아들이지만 창조 작업을 끝까지 이어 나가지 못하고 이에 분노한 크리쳐는 엘리자베스를 죽인다. 절망한 빅터는 또다시 죽음에 맞서고자 엘리자베스를 살려낸다. 하지만 크리쳐와 같은 자신의 모습에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라진 크리쳐를 찾아 나선 빅터는 지친 채로 한 선상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크리쳐는 그의 죽음에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그는 나의 아버지였다고. 이후 크리쳐는 빅터와 함께 스스로 불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영화가 끝난 이후, 애연한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한 사회적 약자가 떠올라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크리쳐와 같이 표면적으로 다른 외모를 가지진 않았으나 그 집단에 속한 이들은 특정 지역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아간다. 바로 조선족이다. 이들은 어디에도 강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꿈을 위해 대한민국에 이주하여 우리와 함께 살아가지만 잠재적 위험자로 낙인이 찍혀 있다. 대림동이 범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이 저지르는 범죄율이 우리나라 외국인 중 가장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은 엄청난 사회적 낙인 속에서 살아간다.
내 주변에 조선족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정말 순수하고 따뜻하며 남을 진심으로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태어난 지역으로 먼저 판단받는다. 항상 어딘가 움츠러든 그 친구의 모습이 크리쳐와 겹쳐 보여 영화를 보는 내내 참 마음이 아팠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이기적인 빅터와 겉모습만 보고 크리쳐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하지만 괴물이 아닌 존재를 괴물로 만드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 집단의 모습과 다름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크리쳐의 슬픔에만 마음 아파하기보다 우리 안에 내재된 빅터의 모습에 자성하며 작품을 감상한다면 어떨까. 사회에서 괴물이라고 불리는 이들, 괴물이 되는 이들을 양산해내는 책임이 우리에게 1차적으로 있을지도 모른다.
수강 중인 타 학과 수업에서 브라이도티의 ‘되기 프로젝트(Becoming Project)’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다. 브라이도티는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 건강한 백인 남성이기 때문이다. 백인 남성이 중심이 되면서 동양인 남성, 장애인, 여성 등은 항상 타자화 되어왔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그녀는 되기 프로젝트를 제시한다. 되기(becoming)는 존재(being)와는 다른데, 후자가 고정적으로 존재를 바라본다면 되기는 존재의 유동성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어보면서 타자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관계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
한 학우는 ‘되기 프로젝트’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드러냈다. 직접 겪는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그 입장에 잠깐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브라이도티의 프로젝트가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되기 프로젝트에 대한 효과나 통계적인 결과를 깊이 찾아본 적은 없지만 나는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라 단언했다. 문학이 주는 힘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세월을, 겪어보지 못한 아픔을 문학을 통해 미약하게나마 경험해본 적이 있다. 그 경험은 나라는 주체를 둔 채 인물을 타자화하거나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문학과 되기 프로젝트는 상상으로, 간접적으로 그 입장에 설 수 있도록 돕는다. 글과 영상의 힘을 빌려 타자를 타자화하지 않는 노력이 쌓인다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달라지지 않을까. [프랑켄슈타인] 속 크리쳐의 삶에 감히 서서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주체들이 보다 다양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참고문헌>
감각과 물질의 사회학. 김은성. 갈무리
소설 [프랑켄슈타인]과 영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장정희. 문학과 영상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