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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베베 May 09. 2023

4월의 연구생 기록

중요한 건 꺾였는데 그냥 하는 마음




폭풍 같았던 3월을 견뎌내며 이제 공부하는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었고, 공부 말고는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까 딱 3일만 쉬고 다시 달리자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4월 한 달을 푹 쉬었다. 미뤄두었던 잠은 사나흘 정도 푹 자면 될 줄 알았는데 웬걸. 보름을 자도 모자랐다. 공부가 아니면 할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참나. 온종일 누워서 폰만 들여다봐도 새롭고 짜릿했다. 밥 먹는 시간 아끼려고 고구마, 바나나, 프로틴만 줄곧 먹었더니 식욕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웃기는 소리. 끼니마다 다른 빵집에서 빵을 한아름씩 배달시켜 먹어도 허기가 가시질 않았다. 어쩌면 나도 새벽형 인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얼마나 우스운 착각이었나. 그렇지만 내가 생각한 나와 실제 내가 다르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실망할 나이는 지났다. 꺾이지 않는 마음보다 더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나는 하루 8시간을 넘게 자야 하고, 먹는 걸 좋아하고, 누워있는 걸 지독히 좋아하는 게으른 인간이다. 그게 뭐 어떤가. 이렇게 꺾인 인간이어도 계속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속 편한 소리 한다고? 뭐 어때.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 마음먹은 뒤로는 그동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시작했다.


1. 보다가 중단했던 <미스터 션샤인>을 이틀간 몰아서 봤다. 아아.. 유진초이... 구동매...

기획 단계부터 역사적 왜곡 문제로 잡음이 있어 기대만큼 흥행하지는 못했다고 들었는데, 지적된 문제들이 잘 수정된 모양인지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연출, 연기, 서사 모두 만족스러웠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등장인물들이 굉장히 많은데도 누구 하나 가볍게 소비되지 않고 한 명 한 명 개성 있게 구현되었다는 점이었다. 작가가 자기 작품에 어느 정도로 애정을 쏟아야 가능한 경지일까. 창작자의 지극한 정성과 애정이 깃든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도 더 많은 수용자들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 그런 작품은 비록 제시된 시점에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고 해도, 오래 살아남아 결국 다시 평가되리라 믿는다.  방영 당시에는 외면받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각 OTT 플랫폼 순위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미스터 선샤인>을 보아도 분명 그렇다.


2. 정말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파벨만스>, 그리고 재개봉한 <레디 플레이어 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파벨만스>는 굉장히 우아했는데 그간 보아왔던 스필버그의 작품들과는 호흡부터 다른 느낌이랄까.  하기야 영화 찍으려고 태어난 것만 같은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이 어떤 영화인들 못 찍겠냐만. 영화 내내 흐르는 피아노 연주 덕분에 모처럼 귀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추억을 떠올리는 재미보다 피로감이 더 컸다. <트랜스포머>를 보면서 처음 자각했고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를 보며 확신한 사실인데, 나는 CG가 많이 사용되었거나 화려한 화면이 빠르게 움직이는 영화에 취약하다. 늙은이 같이. 아, 늙은이 맞네. 뭐 어때. 이렇게 쓰면서 생각해 보니 <레디 플레이어 원>은 정서적 측면에 있어서, 그리고 주제에 있어서도 <파벨만스>와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영화다.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두 영화를 한 감독이 5년 간격으로 찍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헐리우드의 대명사 스필버그인 것이다.  



이제 문제적인 것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 영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아서 따로 글을 쓰려고 글감을 모아 서랍에 저장해 두었는데, 오랜 지병인 완벽주의좋아병+미루기병으로 인하야 탈고와 발행이 요원하므로 "일단" 여기에 짧게 기록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월간이 될지, 격월이 될지 알 수 없는 "연구생의 기록"이라는 기획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우리가 2023년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감상하는 이유는, 인간이 아직 달에 착륙하기도 전인 무려 55년 전에 이름부터 거장다운 스탠리 큐브릭이 구현해 낸 우주와 우주선의 이미지를 감상하고 이 작품이 영화사에서 갖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함일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감상하는 것과, 서사적으로 잘 짜인 고전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그 목적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55년 전의 영화적 상상력으로 빚은 이 영화의 장면 장면을 경험하는 것은 놀라움과 즐거움의 연속이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실험적인 특수분장, 정교하게 설계된 우주선, 당시에는 분명 센세이션 한 것이었을 특수 효과와 촬영기법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굉장히 지루하게 느껴졌다는 것이 내 집필 의욕에 불을 지핀 것이다.

비단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뿐만이 아니다. 영화사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 위대한 고전영화들을 오늘날 재미있게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음악철학에서 자주 논의되는 정격성(Authenticity)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 정격성은 맥락에 따라 진정성, 정통성으로도 번역되는데 다층적 논의들을 포함하고 있고 여러 학문분야에서 사용하고 있는 복잡한 개념이다. 간단히 기록하자고 시작한 글에서 다 얘기할 필요 없으니 (그럴 능력도 없다) 필요한 얘기만 추려서 하자면, 요는 [서양] 고전음악작품을 연주할 때 어떤 연주가 정격인가 하는 것이다. 작곡가의 의도, 규정된 악기, 소리적 정격성 등 다양한 기준이 제시되고 있지만 이 맥락에서 주목 것은 '지각성 정격성'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지각성 정격성은 또 역사적 청취와 역사주의적 청취로 세분되는데 각설하고, 결론은 현대의 관객들은 당대의 관객들이 했던 것과 같은 감상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역사적 지식을 갖추고 당대의 시선으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려고 노력하고자 해도 마찬가지로 가능하지 않은데, 이는 당대 관객의 관람과 우리의 관람 사이에 존재하는 필연적 경험적 차이 때문이다. 특수분장에 친숙하지 않았던 1960년대의 관객들에게 원숭이 분장은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겠지만, 특수분장에 친숙한 2023년의 관객에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원숭이가 조악하고 시시하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고전영화에서 무엇을 감상해야 하는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는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비주얼을 감상해야 한다. 우리는 흰색과 붉은색 단 두 가지 색 만으로도 시선을 압도하는 놀라운 심미성과 세련된 디자인, 감각적인 영상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2023년에 갖는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또 영화 역사상 가장 미적인 영화 중 한 편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다. 이 미적 황홀경을 지각하는 경험 만으로도,150분을 감내할 가치는 충분하다.  하여,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반드시 극장에서 보시라는 이야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역사적인 눈으로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에 대해 따로 쓰려고 했던 글의 대부분을 결국 여기에 다 쏟아부었다. 이렇게 완급조절을 못해서야.

5월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한달간 푹 쉬었으니 다시 슬슬 나아가. 언제 또 120%를 끌어내야 할지 모르니 80% 모드로, 탈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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