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가 없어도 괜찮다
열매는 덤이다.
고생은 사서 하는 고생이 꿀이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효율을 엄청 따지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에 쏟아부은 노력 그 이하의 결과물을 받아 들었을 때 노력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들인 노력만큼의 열매를 따길 원했고, 노력에 비해 과분한 열매라면 금상첨화였다. 예를 들면, 중간고사 공부에 100시간을 들여서 정직하게 100점을 맞는 것보다 50시간을 들이더라도 운 좋게 70점을 맞는 게 기분이 더 좋았다.
지름길이 있으면 주저 않고 그 길을 택했다. 과정이 지난할수록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고 허무와 우울이 줄다리기하듯 마음을 흔들었다. 결과물이 좋지 않거나 나올 기미가 안 보일 때면 삶이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노력보다 마지막의 결과물이 중요했던 내게 박사과정과 글쓰기와 음악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았다. 별생각 없이 시작한 박사 과정은 횟수로 어느새 5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여느 박사 과정이 그렇듯 그동안의 노력을 증명할 수 있는 성과는 미미하다. 틈틈이 하고 있는 글쓰기와 음악도 마찬가지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월간에세이라는 잡지로부터 원고를 요청받은 일 외에 구독자 수가 크게 늘었다거나 출간 제의를 받았다거나 하는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제11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하고 발표날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감이 쌓여갔지만 역시나 수상작에 뽑히지 않았다. 푸른초록이라는 예명으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부로 지금까지 다섯 장의 싱글 앨범을 발매했지만 당연히 유명해지지 못했다. 일 년 동안 입금된 저작권료는 5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최근 들어 두 차례 작곡 공모전에 출품했지만 수상하지 못했다.
극한의 효율충이었던 예전의 나라면 이런 성적표를 보고는 크게 실망하며 냉정한 마음으로 메타인지 스위치를 켜고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했을 것이다. 각 분야에서의 내 실력과 재능의 위치는 백분위로 따졌을 때 어디쯤일까. 지금 눈앞에 놓인 결과가 좋지 않으니 비관적 결론에 도달했을 게 뻔하다. 허공에 삽질하는 뻘짓들에 제동을 걸었을 거다. 돈 안 되는 음악. 대중적이지 않은 글. 인기 없는 전공. 비주류적 시각의 논문.
다행스러운 것은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매의 크고 작음은 내가 정할 수 없다. 노력=열매라는 유토피아적인 방정식은 성립될 수 없다. 억울하지만 운, 인맥, 상황, 사회적 선호 등 나의 노력과 상관없는 요소들이 열매의 유무와 크기를 결정할 때가 많다. 그러나 노력의 크고 작음은 내가 정할 수 있다.
지름길만 걷는 삶은 짧고 편하지만 충만할 수 없다는 걸 이제 안다. 열매 맺은 낡은 길 보다 열매 맺지 못한 새로운 길을 걷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오히려 그게 내 성향에 맞다. 한 가지를 깊게 파기 보다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작은 것들을 가꾸고 나누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다.
한 해를 돌아보며 열매가 없음에 실망하지 않았다. 아직 열매가 되지 않은 씨앗들에 감사했다.
혹여 모든 씨앗이 열매가 되지 않을 운명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열매가 떨어지기도 전에 패배감에 휩싸여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항상 열매가 있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쓸모없어 보였던 시간들에도 나름의 쓸모가 보인다. 모든 시간은 동등히 의미롭다.
열매가 없어도 괜찮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돈 안 되는 음악을 만들고, 읽히지 않을 글을 쓰고, 빛을 보지 못할 정책에 대한 논문을 쓸 거다. 열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