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2일 목요일 갑진년 병자월 경술일 음력 11월 12일
중고생 때의 나는 인간 심리에 대한 소소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관련 서적을 읽기에는, 내가 독서를 어느 정도 즐기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의 일이다. 영상 매체에 대해서도 불편한 시청각 자극이라고 느껴 관련 분야의 영상을 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뿐더러, 애초에 영상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2년 몇 개월 전에 「전지적 할부지 시점」을 계기로 유튜브 어플에 처음 로그인했던 녀석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난 나의 내면을 탐색하게 되었다. 언젠가 연구되었을 법한 내용에 대해서도 전문 용어를 알지 못한 채 혼자 탐구하곤 했다.
나 한 사람에 대한 탐구로는 인간 심리 전반을 이해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일반화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을 가지고 사회 실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변수가 통제되지 않는 소소한 실험은 가끔 했던 것 같기는 하다. 물론 그 '변수가 통제되지 않는'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유의미한 실험인지는 의문이지만. 이제 와서는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언젠가의 이야기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여간 그 당시에 느낀 것 중 하나가, 무의식이라는 녀석은 정말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내가 나 자신을 속일 수 있을까. 나를 속이기에는 나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속일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에게 라포 형성을 하는 게 가능했다. 나에게 '하유진'이라는 친구는 존재하지 않지만, 내 안에서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랜선 친구만큼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게 왜 되지, 하면서도 흥미롭게 보는 부분이다. 비단 이 녀석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이제 와서는 의식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나조차 헷갈리는 정보들도 있다. 그게 헷갈리기 시작할 때쯤 이 짓은 그만둬야지, 하고 판단했지만 말이다.
무의식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면 나의 의식이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어도 나의 내면에서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판단하게 된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동기 부여를 할 때 그 무의식의 영역에 닿지 못한다면 의지를 갖지 못한다. 반대로 나의 무의식이 그 필요성을 느낀다면 나의 의식이 귀찮아하거나 거부감을 느낀다고 해도 나는 해 나간다. 때로는 나 자신과 내면의 대화를 하던 도중 깨닫게 되는 무언가가 내 삶의 방향성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아무 하고나 친해지지 못하는 것도 이 무의식이라는 녀석이 인간관계를 필터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이 거부하면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상대와 친해질 수 없음을 느낀다. 그런 이에 대해서는 상성이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무의식이 허락한 이들만이 내가 친해질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이며, '친구'라고 불릴 수 있는 건 친밀도에 의해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저 무의식이라는 녀석이 판단하는 것이다.
하여간 너무 많은 부분들이 무의식의 영역에 블랙박스 상태로 존재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남들이 의식의 영역에서 수행하는 것 중 상당수를 나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수행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녀석만 잘 컨트롤할 수 있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고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무의식을 잘 세뇌하면(?) 엄청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