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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휘 Dec 01. 2024

#87 인간관계

2024년 12월 1일 일요일 갑진년 을해월 무술일 음력 11월 1일

최근에 어딘가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일이 있었다. 애인과 헤어진 후 소개팅 어플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헤어진 애인에게서 다시 연락 온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그 시작이었다. 그 와중에 그 사람이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하는, 한 사람과 얽힌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새삼, 역시 이런 복잡 미묘한 관계는 제삼자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나서 봐야 재밌다. 모임의 주최자가 일단 양다리 해보고 '너 똑바로 안 하면 저 사람을 선택해 버리는 수가 있다' 같은 태도를 보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으며 참 재밌는 사람들이야, 하고 웃어넘겼다.


그 자리에서도 했던 말이고 늘 나의 기저에 깔려 있는 가치관이기도 한데, 나는 관계의 규정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다.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그저 지인이고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친구고 여기부터 애인이다, 그렇게 명확히 규정지을 경계선이 어디인가. 나의 친구들은 인간관계의 스펙트럼 위에 존재하다 조금씩 이동하여 어느 순간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구역에 도달했는데, 구체적인 계기와 시점은 알지 못한다. 그저 어느 순간 보니 친구의 영역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친구인지도 모른 채, 문득 생각해 보니 이 정도면 친구 아닌가, 하는 인지 후에야 친구라고 규정되곤 한다. 스펙트럼 상의 구체적인 위치에 따른 세부적인 관계의 명명이 필요한가? 어느 정도까지 세분화하여 규정하는 게 적당한가? 게임 시스템 상의 친밀도 레벨이 오르듯이 계단식으로 오르는 관계의 규정이 현실의 삶에서도 적절한가?


지인과 친구뿐만 아니라 그 인간관계의 스펙트럼이 애인의 영역까지도 뻗어 있음이 나의 폴리아모리적 사고의 근간이었다. 한 사람이 그 영역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내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관계성인가. 남녀 간의 일대일 관계가 아니고서야 비정상적인 관계로 취급해 버리는 사회에 대한 어떤 불만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러한 관계의 연장선인 가족 제도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었으며, 여타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에 대한 사회의 인정을 요구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제 와서는 그런 걸 논하기도 지쳐 버려서 그런 사회적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말이다.


현재 나의 인간관계는, 글쎄. 누군가는 나에게 함께 다니는 친구 무리가 있어 부럽다고 했지만, 미정이도 나래도 알게 된 지 1년쯤 지나서야 친구가 되었다. 낯선 존재에서 친구의 범위로 들어오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많은 경우 그 정도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내 삶의 영역 밖으로 사라진다. 친구의 친구로 소개받는 경우에는 어느 정도 프리패스하여 보다 쉽게 친구 언저리가 되긴 한다. 그리고 여고 생활에서 비롯된 여성 분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모양이다. 특히 강한 인상을 가진 여성 분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길 때 함께 하기가 너무 힘들다. 만일 타고난 상성도 안 맞는 와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쪽의 그분이다. 나의 정신력 수치에 따라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나를 정서불안 상태로 이끌 수도 있는 바로 그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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