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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휘 Nov 30. 2024

#86 걷기

2024년 11월 30일 토요일 갑진년 을해월 무술일 음력 10월 30일

언젠가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푸른숲 출판사의 『철학자의 걷기 수업』이라는 책을 충동구매한 적 있다. 출판사 직원들이 메모지에 직접 써붙인 추천사가 푸른숲 부스에 나를 머무르게 만들었다. 역시 난 직접 쓴 손글씨 감성을 좋아하는 걸까, 하면서 그곳에 있는 책 중 가장 관심 가는 한 권을 구매했는데, 그게 바로 『철학자의 걷기 수업』이었다. 왜 이 책을 골랐는지는 모르겠다. 책과의 첫 만남도 인간과의 첫 만남만큼이나 형언할 수 없는 감 같은 게 존재한다. 이 책은 나랑 잘 맞는 녀석일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어딘가의 책방지기에게 추천했을 때 이 책의 판매 소식을 들을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기도 했다.


걷기. 어딘가에 이동하는 수단으로서의 걷기가 아닌 걷는 행위 그 자체로의 걷기. 사실 살면서 그리 많이 안 해본 영역이었다. 걸어서 30~40분 걸리는 거리에 대해 거부감이 없어서 걸어 다니는 절대량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걸어서 40분, 대중교통 이용 시 빙 돌아서 40분 걸리는 뭐시깽이한 지리적 조건에 살다 보면 교통비를 아끼고 말지, 하며 걸어 다니게 된다.) 어찌 되었건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다 보니 그 시간에 머리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곤 했다. 무언가를 암기해야 할 경우 책상 앞에 앉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보다 길에서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외우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다. 때로는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몇 해 전인가 이동 시간에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걷기 시작하면서 나의 그런 개인적인 시간이 줄어들었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때로는 어떤 의식적인 활동을 하던 그 시간이 소통의 시간으로 대체된 것이다. 사실 대화는 만나서 하는 게 좋은데, 대구에 있는 녀석이랑은 그러기가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한 소통의 시간도 그런대로 좋긴 한데,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잠을 통해 이루어지는 무의식적인 정리뿐만 아니라 그런 의식적인 정리도 나에겐 중요했다. 그 당시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주변 소음만을 들으며 거리를 혼자 거닐다 보니 그러한 시간이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와 함께인 것도 좋다. 전화 너머로 함께 하는 것보다는 내 옆에 손 닿을 거리에 함께인 편이 더 좋지만. 함께 걷다가, 소소한 대화를 해보기도 하고, 문득 떠오르는 주제로 생각을 나눠보기도 하며, 그렇게 거니는 것도 좋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 나오는 침묵은 어색하고 답답할 수 있어도 함께 걷다가는 침묵과 대화가 반복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둘이서 대화를 한다면 카페 같은 데 앉아서 대화하는 것보다 어딘가 거닐면서 대화하는 편이 더 좋다.


지난 추석 연휴, 청계천을 거닐며 내 삶에 흔치 않은 '걷는 행위 그 자체로의 걷기'를 해보았고, 요즘은 서울둘레길을 돌면서 나름 자주 그러고 있다. 그런 시간을 때로 빼서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유행처럼 무슨무슨 명상이라고 이름 붙은 것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데, '걷기 명상'이라고 하던가. 명상은 '멈춤'이라고 배웠다. 일상의 다른 것들을 멈추고 그저 어디론가 걸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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