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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Dec 14. 2024

[연재] 가을과 겨울사이

#2. 봄의 시작

"나수경 님 저기 지금 길 건너시는 분 위험한 거 아닙니까? 신호 바뀔 때가 된 것 같은데 말입니다."


퇴근길 혼잡한 주당역 주변을 교통정리를 하고 있던 기석 무리에게 그만 경찰서로 복귀하라는 무전을 받던 찰나였다.


"유이경 가서 저분 안전하게 인도로 안내하신분증만 확인해 딱지는 떼지 말고"


"넵"


진섭은 기석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파란불이 깜빡이고 있는 횡단보도를 향해 쌩하니 달려갔다.


기석은 서로 복귀하려던 길에 늦게 횡단보도에 진입한 보행자를 발견했고 매일 아침 기대하며 기다리던 그녀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봤다. 무전 소리에 묻힌 기석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알아챌 새도 없이 마치 망원경을 갖다 댄 것 같이 보인 것은 끊어진 구두를 걸친 채 불편히 걷고 있는, 누가 봐도 시려 보이는 작은 발이었다.


기석은 진섭을 투입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불안한 맘으로 지켜보고 었는데 자기 나타나 당차게 진섭을 몰아세우는 그녀의 동생인 듯한 여성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혼잡한 금요일 퇴근시간 지하철 출구엔 이 상황이 궁금해 발걸음을 멈춘 시민들로 속히 상황도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기석이 그만 가셔도 좋다는 안내를 자마자 인상이 강렬한 여성은 울고 있는 의 어깨를 감싸고 가는가 싶더니 몇 걸음 걸어가다 말고 다시 휙 돌아서 기석의 일행에게 입으로 욕만 뱉지 않았지 눈으로 있는 대로 눈총을 쏘고서야 다시 걸었고, 소주시에서 근무하며 만난 여성 중에 가장 당차고 기가 센 여자였다.


"와우 누구 여자 친구인지 몰라도 정말 사납지 말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여태껏 이렇게 심쫄하게 한 여자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진섭이 사라지는 자매의 뒷모습을 보며 구시렁대고 있었다.


"야 유이경아 너는 대체 어찌했길래 선량한 시민을 것도 여자를 울게 만드냐?"


찬하 상경이 놀림 반 한심 반의 표정으로 진섭을 향해 물었다.


"나수경 님이 신분증 확인하라고 하셔서 신분증 확인만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우니 당황했지 말입니다. 그런데 나수경 님 신분증은 왜 확인하라고 하셨습니까?"


"확인도 못했으면서 뭘 물어. 그만 복귀하자"


진섭은 찬하에게 장난스러운 눈짓을 보냈고 찬하는 가만히 있으라는 눈짓을 보내며 기석의 기분을 살폈고 경찰서로 복귀해 환복 후 저녁식사를 위해 구내식당으로 갔다.




"나수경 님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작년 이맘때 보리파출소에 삼 개월간 함께 파견근무 나갔던 김우인 상경이 식판을 들고 가다 기석을 보고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래 너도 맛있게 먹어"


기석은 식판에 놓인 콩나물을 한 가닥 한 가닥 집어 입에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기석이 미주를 본 것은 한 달 전쯤이었다. 이른 아침 주당역 교차로의 교통체증을 해결하라는 민원전화에 담당경찰관을 따라 출동했을 때 삼월의 이른 봄 햇살 아래로 나타난 그녀를 처음 보았다. 베이지색 카디건에 청바지, 긴 생머리를 한가닥으로 묶고 베이지색 캔버스화를 신고 한쪽 어깨에 크로스백을 메고 가는 그녀가 기석의 눈엔 마치 보석을 바라보는 세공사가 확대경을 갖다 댄 것처럼 들어와 박혔다. 신분이 직장인인지 대학생인지 알 수 없지만 한 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전이 되는 듯한 묘한 느낌에 눈꺼풀이 떨렸다. 소주에 머무는 동안 다시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30분이 막 지나고 있었고, 지하철 계단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아쉬운 뒷모습을 본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교대 근무지가 바뀌고 주당역에 다시 배정받은 기석은 그녀를 다시 보겠다는 희망으로 이른 근무도 군말 없이 자원해 나갔는데 오늘 아침에도 허탕을 치고 아쉬워하던 중 복귀 직전에 횡단보도에 갇힌 그녀를 보게 되었고, 진섭을 통해 이름과 나이라도 알아보려고 것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들었다 생각하니 갑자기 콩나물이 고무줄처럼 질기고 쓰게 느껴졌다.


"나수경 님 식사하십시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함께 근무를 나갔던 찬하가 기석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을 걸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밥 먹자"


시무룩한 기석의 대답에 찬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밥을 욱여넣었다.




"주당역 사거리에서 승용차 추돌사고 신고 왔는데 두 명만 출동하지"


교통계 최경장이 내무반을 향해 건들거리며 말했다.


"예. 저랑 박찬하 상경이랑 나가겠습니다."


기석의 갑작스러운 대답에 찬하가 눈을 크게 뜨며 기석을 바라봤고


"3호"


최경장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기석과 찬하도 따라 뛰었다.


"아니 나수경 님 아침도 못 먹었는데 갑자기 지원이라니요?"


"내가 복귀 전에 너 좋아하는 불고기버거 사줄게"


"앗싸"


기석과 찬하는 3호 순찰차에 몸을 실었다.




"이제 정리 다 된 것 같지. 그만 복귀할까?"


함께 출동했던 최경장이 수동 조정하던 신호기 을 닫으며 기석에게 물었다. 시계를 보니 7시 25분. 아직까지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주당역 교대 근무도 얼마 남지 않아 아쉬움이 있는 기석의 마음이 조급하던 그때 갑자기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마치 거짓말처럼 횡단보도 건너편에 마치 은행직원처럼 군청색이 도는 투피스에 까만 플랫슈즈, 까만 핸드백에 서류 가방을 든 그녀가 지하철 역으로 가려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수경 복귀"


"네 알겠습니다."


기석은 오늘 그녀를 봤다는 안도감에 미소 지으며 성큼성큼 순찰차를 향해 달려갔다. 순찰차 유리창에 비치는 4월의 햇살이 이렇게나 반짝이고 예쁜 것이었나?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미주 씨 오늘 세무서 들어가는 날이지?"


"네 과장님"


"잘 다녀와요. 일찍 가도 점심시간 걸치면 시간 걸릴 테니 사무실 들어올 생각 말고 거기서 바로 퇴근하고"


"아니에요 사무실 들어왔다가 퇴근해도 돼요"


"아 거 참 말 많네. 아니 과장님이 알아서 배려를 해 주시면 네 알겠습니다 하면 되지 왜 똥고집을 부리고 굳이 다시 들어오겠다고 해요? 가만 보면 은근 성격 이상해"


오늘도 여지없이 들이박는 고대리 놈의 주둥이를 팔뚝에 붙은 모기를 잡듯 냅다 후려치고 싶었지만 미주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미주 씨, 미주 씨가 일찍 들어가야 나도 나중에 기회 왔을 때 양심의 가책 없이 조기 퇴근할 테니까 오늘은 꼭 일찍 들어가요"


세금계산서 뭉터기를 캐비닛서 꺼내 들고 오던 오경이 웃으며 말했다.


"아 역시 오경 씨는 척하면 척 말이 통한니 깐"


고대리 놈이 빈정거리며 오경을 치켜세웠다.


"고대리님 저는 고대리님하고 일만 하고 싶지 말까지 통하고 싶진 않아요"


오경의 단호한 말에 고대리 놈이 움찔했고 미주는 웃음이 터지려 해 얼른 책상에 고개를 숙였다. 미주는 저렇게 자신의 생각을 농담 같은 진담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오경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느라 미처 고대리 욕할 겨를도 없었다.




세무서에서 오후 두 시까지는 꼼짝도 못 할 거라고 생각했던 미주였는데 점심시간을 온전히 사수하겠다는 법인팀 소중언니의 활약으로 서류 제출은 수월하게 종료되었다. 미주는 갑자기 생겨버린 오후 시간에 급 당황하며 사무실로 다시 복귀해야 하나 잠깐 망설이다 정 과장 오경의 말을 떠올리며, 무엇보다도 다믄 한 시간이라도 고대리 놈을 안 봐도 된다는 생각에 당당히 귀가해야겠다고 맘먹고 주당역에 내려 집으로 가려다 얼마 전부터 들러야지 했던 서점에 들어섰다. 


"대장님 안녕하셨어요?"


"아니 미주 씨.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어서 와"


"저 오늘 땡땡이예요"


"땡땡이라고? 이제 미주 씨도 진정한 직장인이 다 됐네 땡땡이도 칠 줄 알고"


주당서점 주인장인 권대장의 농담에 미주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엑셀의 자만 나와도 욱하고 토가 나올 것 같아 꼴 보기도 싫었던 엑셀 프로그램. 충분히 업무와 관련한 프로그램을 잘 사용하고 있었지만 엑셀을 잘 다룬다는 이유로 고대리 놈은 미주를 대 놓고 무시했었다. 물론 엑셀이 이유는 아니었다. 미주가 졸업을 앞두고 교수님 추천으로 소주시에서 꽤 알려진 이 회계사 사무실로 면접을 보러 왔을 때부터 고대리는 아주 묘한 눈빛으로 미주를 바라봤다. 그리고 졸업과 함께 이사를 끝내고 첫 출근을 했던 날. 미주는 전임자가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간 짐들을 정리하다 필기도구가 빼곡히 꽂힌 연필꽂이에서 작은 프린트물을 발견했다.


"누군지 모를 당신이 이 쪽지를 발견했다면 나는 이미 사무실에서 사라진 후일테고 그렇다면 당신은 나만큼 재수가 없는 사람일 확률이 100%며 절대 ㄱㅇㅇ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 것. 정말 개새끼 중의 개새끼, 썅놈의 새끼임"


미주는 책상을 정리하다 말고 본 쪽지에 화들짝 놀라 얼른 쪽지를 감추었지만 정신없이 쿵쾅대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강예준 세무사는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그 간 안녕하셨습니까? 너무 오랜만에 연락드려 면목 없습니다. 형수님도 조카들도 다 안녕하시지요?"


"아이고야 이거 누구신가? 소주시에 있는 돈이란 돈은 갈고리로 막 쓸어 담고 계시다는 강세무사님 아니신가?"


최정환 교수는 후배 예준에게 걸려온 전화에 농이 짙은 인사를 건넸다.


"음, 이즈음에 전화가 온 것 보니 직원 충원을 부탁할 것 같은데?"


"어이쿠 선배님. 형수님과 전원생활도 즐기시며 학생들 가르치신다고 모교를 떠나신 게 아니라 화주 가셔서 명당에 돗자리 깔고 투잡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어 어떻게 알았어? 나 투잡 하잖아. 요즘 교수놀이가 부직업이고 본 직업이 주부야"


"왜요? 형수님 건강이 더 나빠지셨습니까?"


"나빠지긴. 너무 좋아져서 시의원이라도 나갈 판이야. 집에 붙어 있질 않으니 집에 있는 내가 살림이라도 해야지. 근데 평생 안 하던 살림이 또 한다고 늘어. 안사람이 아주 감동하면서 애들 어리고 젊었을 때 도와주지 않았다고 또 바가지를 있는 대로 긁네. 안 해도 탈, 해도 탈. 그러니 자네도 너무 애처가로만 살지 말아"


"하하하 제가 어디 선배님 그림자만큼이나 좇아가겠습니까? 현겸엄마 아시잖아요. 입만 열었다 하면 다다다 잔소리 많은 거"


"그것도 다 애정이 있고 기운이 있어야 하는 거야. 오십 훌쩍 넘어봐. 잔소리할 기운도 없어. 서로 늙어가는 게 해서"


"네 선배님. 명심하고 친하게 지내볼게요. 그런데 혹시 지난번에 추천해 주고 싶다고 하셨던 그 졸업생은 취업이 결정되었을까요?"


"아 우리 미주? 아니 지금 자격증도 따고 조교일 열심히 하고 있지. 나는 편입을 추천하는데 본인은 취업을 해서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은 봐. 밑으로 학업 중인 동생들이 있어."


"아 그럼 면접 추진해도 될까요?"


"그런데 화주서 소주까지 갑자기 주거지를 옮기게 되어야 하니 가계에 부담이 있을 거야. 연봉을 좀 특별히 챙겨줘 그래야 나도 추천하는 면이 서지. 알잖아. 내가 미주 엄청 칭찬했던 학생인 거. 진짜 상우 맘에 든다면 며느리 삼고 싶을 정도로 아까운 아이야"


"어우야. 선배님이 모교에 계실 때도 학생 칭찬엔 절대 관대하지 않으셨던 분으로 유명했는데 그렇게 반하게 한 학생이 누굴까요? 너무 궁금해서 당장 만나보고 싶은대요. 추천서와 이력서 요청 올리겠습니다. 아직 맘만 봄이지 진짜 봄 아니니까 감기 조심하시고요"


"허허허 그래. 조만간 안사람들하고 식사나 한 번 하자고"




전화를 끊은 최교수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 인터폰을 눌렀다.


"네 교수님"


"오조교 내 방으로"


"네 알겠습니다."


똑똑똑


"교수님 부르셨어요?"


"오조교, 혹시 지난번 내가 소주에 있는 회계사 사무실 제안 했던 것 생각 좀 해봤나 해서"


"교수님 추천은 감사한데 4년제 명문대학교 졸업생들도 많은데 제가 가능할까요?"


"어허, 그럼 전문대에서 학생 가르치는 내가 실력이 떨어진다는 건가? 내가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자린데 자신감 갖고 가도 되는데"


"아니, 교수님 그게 아니라 제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서"


"오조교 정도면 충분하지. 내가 더 가르칠 게 없잖아. 무엇보다 그 회사가 자산이 아주 탄탄한 회사야. 걱정이 많을까 덧붙여해 주는 말인데 그 대표가 내가 정말 아끼는 대학 후배기도 하고 집안이기도 하고. 내가  오조교 정말 아껴서 편입 밀고 싶지만 개인 형편상 어렵다고 하니 추천하고 싶어서. 그런데 소주로 가게 되면 머물 곳은 있나?"


"바로 밑에 동생이 소주에 있는 H대학에 다니고 있어 부모님께서 집을 얻어 주셨어요."


"아 그래. 정말 잘 됐네. 그럼 걱정이 줄었어. 앞으로 추천서랑 서류 꾸려서 면접을 가야 하니 메모해 주는 서류들 미리 준비해 놓고. 다시 연락 줄게"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미주는 최교수 방을 나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다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조교실로 달려갔다.


"엄마? 나"


"너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오늘 일찍 와?"


"엄마 지금 교수님 실에 다녀오는 길인데 지난번에 말했던 소주 사무실 말이야. 교수님이 추천서 써주시겠다고 면접일자 잡히면 알려주신대"


"아이고야 잘됐다. 혹시나 2년 제라고 안 뽑아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아이고야 잘됐다. 미리 하고 같이 지내면 되겠네"


"응 엄마. 이따 집에 가서 또 얘기해요. 끊어요"


미주는 미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조만간 소주로 면접 보러 갈 것 같아]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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