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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가을과 겨울사이

#3. 그녀의 이름

by 별바라기

강예준 세무사는 등기우편으로 도착한 미주의 입사지원 서류 봉투를 손실장에게 건넸다.


"실장님 신입사원 입사지원 서류 제가 먼저 검토했습니다."


손실장은 예준이 건넨 서류를 살펴보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 정말 탐나는 인재를 추천받으셨네요. 최선배가 왜 며느리 삼고 싶어 했는지 짐작이 가요. 선하면서도 또렷한 눈매며 다부진 입매까지. 그런데 고대리 밑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요? 미스윤처럼 근무하다 말고 또 잠수 타면 정말 큰일인데"


손실장은 예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면접준비 잘 부탁드리고 손실장님께서 티 나지 않게 돌봐 주세요"


"이럴 때만 손실장님인가요 사좡님?"


"예 마님"


예준과 손실장은 사무실로 나갔다.


"고생들 많아요. 잠시 전달 사항이 있어 전합니다. 지금 직원 공백으로 어려움이 많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다음 달 신입사원을 채용할 예정으로 면접을 진행하니 기운 내서 근무해 주기 바랍니다."


"표면적으로만 면접이지 일종의 낙하산 아닙니까?"


고대리가 예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용히 구시렁 거리는 소리가 손실장의 귀에 들리자 손실장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우리 고대리도 공개 면접으로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사장님 낙하산이었나 봐요?"


"아니 실장님. 무슨 농담을 진담 같이 하십니까? 저는 정정당당히 제 실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요. 여기에 낙하산이 어딨습니까? 패러글라이딩도 못해본 사람들이"


손실장의 유하지만 뼈 있는 대답에 이 상황이 웃긴 직원들이 웃음을 참으며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고

고대리가 작정한 듯 말을 이었다.


"그니까 실장님, 신입사원 말고 경력직을 뽑아 주세요. 신입사원 뽑아서 일 가르칠만하면 나가고, 또 가르치면 나가고. 피곤하고 비효율적입니다. 남 좋은 일만 하는 것 같고"


"그러게요. 저도 그 점이 너무 안타까워요. 우리 고대리처럼 능력 있는 경력직을 뽑으면 좋을 텐데 이 소주에서 그런 경력자를 찾기가 렇게나 힘드네요."


손실장의 말에 고대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고 돌아서는 손실장의 입에서 조용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으휴. 저 어린것"




미스최는 처음엔 잘 적응하는가 싶었다. S대를 졸업해 은행 수습생이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예준의 사무실에 지원서를 넣었고, 손실장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며 과할 정도로 환영 회식을 추진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째가 되자 미스최의 그 환하던 미소는 사라지고 낯빛이 흑색으로 변하더니 언제부턴간 점심 식사도 거르고 회식에도 빠지고 조퇴를 하고 결근을 격일로 하더니 결국 전화번호까지 바꾸고 잠수를 타버렸다. 갑자기 생긴 직원의 공백으로 시즌 업무에 차질이 생긴 예준은 급하게 채용공고를 냈는데 운 좋게도 경력이 있는 미스윤이 입사를 했지만 미스최와 같은 증상을 보이다 또 잠수를 탔다. 벌써 이번까지 직원이 바뀐 게 몇 번째 인가? 예준과 손실장은 그 원인을 다방면으로 분석해 보았고, 직원들의 이직률이 높아지기 시작한 시점이 고대리가 입사한 후부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해 27살인 고대리는 강세무사가 대한민국 최고의 세무사들만 모아뒀다는 일터를 박차고 나와 소주시에 개업 후 첫 해에 뽑았던 직원이었다. 지방에 있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설 사무실서 경리 업무를 보던 고대리는 업체 부도로 일자리를 잃었고 단기 아르바이트와 무직 생활을 반복하다 예준이 지역신문에 올린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왔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현장에서 잔뼈가 굵어 있던 눈치 빠른 청년이었기에 조카처럼 아끼며 일을 가르치며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희한 케도 여직원들이 입사를 할 때마다 처음엔 관심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도와주는가 싶다가도 결국은 교묘하게 괴롭혀 퇴사를 종용했고 그 이유가 학력 콤플렉스이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 정확한 사유를 알지 못했던 것은 여직원들이 전부 잠수를 타거나 친구나 자매를 대리인을 내세워 짐들을 챙겨갔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마지막 근무자였던 미스윤은 모든 개인물품을 폐기해 달라고 문자로 요청했고, 궁여지책으로 남자 직원을 채용했지만 고대리와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다가 결국 퇴사라는 같은 결과였고 돌고 돌아 지원율이 좀 더 있는 여직원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 지난주 그 어렵다는 면접을 거뜬히 마치고 오늘부터 근무하게 된 오미주 씨입니다. 화주에 있는 학교서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우리와 한솥밥 먹게 되었으니 많이들 도와주시고 오미주 씨 인사 한 번 들어볼까요?"

"안녕하세요 소개받은 오미주입니다. 많이 가르쳐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화주? 그 작은 동네도 학교가 있어요? 이름이 뭐라고요? 오미자요? 오마주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안 들립니다."


고대리의 깐족거림에 미주의 눈빛이 흔들렸고 예준도 적잖이 당황했다. 순간 분위기가 싸해진 것을 느낀 고대리는


"하하하 너무 어색할까 봐 제가 농담 좀 했는데 안 먹혔네요. "


그 말을 들은 미주가 수줍게 웃었고 분위기는 일단락되는 것 같았으나 가슴 한 구석이 싸해지며 쉽지 않은 곳이 되겠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전임자가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간 책상을 정리하다 연필꽂이 바닥에 감춰둔 메모를 보게 된 것이었다. 이름 이니셜 ㄱoo. 그 이름은 누가 봐도 고대리의 이니셜이었다.




서점에서 미주는 엑셀 관련 도서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고대리가 묻는 엑셀 질문에 당황부터 하지 않고 대답이나 잘하면 좋겠는데'


본인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한 미주는 책장을 넘기다 말고 본인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고, 그 모습을 기석이 보고 있었다.




"나수경 님 혹시 오늘 낮에 주당역 근무 없으십니까?"


옆 내부반의 김이경이 조용히 물어왔다.


"응 이따가 1시부터 3시까진데 왜?"


"혹시 그럼 복귀하실 때 주당서점서 엑셀 관련 도서 좀 사다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갑자기 엑셀은 왜?"


"이것저것 정산하기엔 그 프로그램이 좋다고 하여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프로그램이 깔려 있긴 하고?"


"최경장님이 서에서 구해 준다고 공부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기석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또 최경장이 날로 먹으려는 것이 눈에 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따가 복귀할 때 사다 줄게"


그렇게 교대 시간이 되어 서점에 들어간 기석은 김이경이 부탁했던 책을 찾고 있던 중이었고 약간의 정적이 흐를 무렵 서점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와 서점주인과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들렸다. 그리고 기석의 옆에 누군가 다가와 골똘히 서적들을 살펴보다 자신의 머리에 알밤을 먹이는 모습의 주인공은 기석이 그렇게나 궁금해하고 자세히 가까이서 보고 싶던 그녀였다.

항상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있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투피스 정장을 입고 직장인인 그녀가 퇴근시간도 되기 훨씬 전인 대낮에 동네 서점에서 여유롭게 한 장 한 장 진지하게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 기석에겐 마치 꿈같은 놀람 그 자체였다. 혹시나 누군가 들을까 싶을 정도로 쿵쾅거리는 벅찬 심장을 조용히 심호흡으로 진정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어색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척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자연스러운 척 미주 곁에 가까이 나란히 서 내려다보니 향수인지 섬유유연제인지 풍기는 은은한 그녀의 향기가 좋았고 기운 있어 보이는 단정한 머리카락, 동그란 이마, 긴 속눈썹, 오뚝한 콧날, 야무지게 다문 입술,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화장을 한 그녀가 기석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곱고 고왔다. 그런데 그 감상도 잠깐 그녀가 결심한 듯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고 기석도 얼떨결에 그 책을 따라 집고 계산대 앞으로 갔다.

"대장님 이거 주세요"


"직장생활도 힘든데 무슨 공부를 더 하겠다고 이 어려운 책을 사"


"제가 공부를 더 해야 책을 사고 책을 많이 파셔야 대장님도 부자 되시죠"


"허허허 미주 씨 얘기 듣고 보니 그러네"


'아 이름이 미주구나'


서점 주인과의 대화에 미주가 환하게 웃었고 미주의 웃음소리가 마치 이른 봄날에 은은하게 퍼지는 풍경소리 같았다.


계산을 마친 미주가 인사를 하고 서점을 나갔고 같은 책을 내미는 기석을 보며 서점 주인이 물었다.


"나수경도 이 책을 사네? 하긴 요즘 이 책이 잘 나가긴 해. 잘 배워두면 한글보다 이게 더 편하다고 하더구먼 젊은이들이 죄다 공부만 하나 봐. 나수경도 맨날 공부만 하지 말고 땡땡이도 좀 치고 그래"


"하하하 어디 의경이 사람입니까. 경찰 그림자죠"


기석은 지역 유지인 서점 주인에게 괜한 진심을 건넸다 싶어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서점 주인은 개의치 않고 거스름 돈을 건네주었다. 서점을 급하게 나온 기석은 점점 멀어지는 미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손목시계의 시간을 보았고 몸을 돌려 경찰서를 향해 있는 힘껏 뛰었다. 분명 숨이 찰 상황이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오늘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았기에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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