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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가을과 겨울 사이

#7. 고대리의 비밀

by 별바라기

여느 날 같았으면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고 사무실로 돌아갔을 연욱이지만 오랜만에 손끝이 달달 떨리는 묘한 기분이 들어 오랜만에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연욱은 우선 윗주머니에 넣어온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한 모금 시원하게 빨아 당기자 그제야 혼미했던 정신이 돌고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유미주가 엑셀을 다룬단 말이지'


다시 담배를 힘껏 빨아 당기며 연욱은 눈앞에 펼쳐진 주당동 일대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미주가 입사를 한 건 2년 전이었다. 미스윤이 시름시름 앓다가 잠수를 타자 사람들은 그 이유가 연욱 때문이라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지만 연욱은 직접적으로 미스윤을 괴롭힌 적이 없기에 당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지방에 있는 전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강세무사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교수의 특별 추천으로 신입 여사원이 온다는 소문이 돌더니 첫 출근한 신입사원은 연욱이 보기에도 참해 보였다. 그리고 이어 오경이 입사를 했고 그 둘은 둘만 시시덕거리며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입사순으로 보나 나이로보나 연욱이 본인들보다 선배고 직급도 높은데 계집애들이 연욱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것 같아 괘씸했고, 평소 본인의 말에는 짧게 대답하던 미주가 오경이 오고 나서부터 길게 대화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본인이 무시당하는 거 같아 화가 치밀어 감정이 통제되지 않기 시작했다. 게다가 둘이서만 대학 전공 서적 얘기를 할 때면 화가 더 치밀기 시작했는데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못 간 게 아니라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대학을 안 간 것뿐인데 대학 나왔답시고 꼴값 떠는 꼬락서니를 봐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드센 오경보다는 순한 미주가 만만해서 미주에게 가시 돋친 말들을 던져댔는데 어느 순간 미주의 업무 이해력과 업무 처리 실력은 연욱을 능가하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고, 어디서 말이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손실장이 미주에게 특별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소문을 듣고 나니 미주나 오경이 본인보다 연봉이 높을지도 모르겠다는 각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숨이 멎었다.


벌써 다 타버린 담배.

연욱은 꽁초를 마치 바퀴벌레를 밟듯이 꽉꽉 밟고 계단을 내려 사무실로 돌아갔다.




미주가 건넨 디스켓 확인 후 담배를 피우러 간 고대리가 꽤 긴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 미주는 복도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퇴근이고 해가 길어졌다지만 아직까지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소소리바람, 순식간에 서산으로 숨어버린 초봄의 해님 덕분에 금방이라도 깊은 밤이 올 것 같은 느낌과 사무실을 나가기 전 애써 숨기는 것 같았지만 고대리가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묘한 표정을 포착했기에 또 불편한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주변이 온통 어둠이었다.


미주는 첫 출근을 했을 때 얼굴도 모르는 전임자가 남기고 간 의문의 메모를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보았다. 정말 나쁜 사람임을 알리고 싶어서 이름의 초성을 남기고 갔을 수도 있을 테고 또 드라마에서 단골 소제로 나오는 사내연애를 하다 헤어져 힘듦을 극복하지 못한 한 사람이 퇴사를 했을 수도 있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설은 많았지만 과연 저 까칠하고 차갑고 때로는 비열함도 서슴지 않고 보여주는 남자에게 꽂히는 여자가 있을 것인가? 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였다. 그리고 오경의 투피스 사건이 있은지 한 주나 지났지만 일주일 전 점심시간에 튄 육개장 방울을 여전히 달고 다니는 고대리를 보니 괜스레 속이 울렁거렸다.


일주일 전이었다. 오경이 분홍색빛이 도는 투피스를 입고 출근을 했다.


"오경 씨 너무 예뻐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먼저 출근해 있던 미주가 오경을 보고 감탄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미주 씨 어울리는 거 같아요?"


"네 너무 잘 어울려요. 약간 예복 느낌도 나고요"


"미주 씨 예리한대요. 원래 월급 노예에게 주는 선물이었는데 대학 선배가 결혼한다고 들러리를 서 달라고 해서 겸사겸사 질렀어요"


"오경 씨 선배보다 더 예뻐 보이겠는데요"


미주가 오경을 보며 웃고 있던 그때


"유난도 유난도. 아니 옷 한 벌 샀다고 어떻게 신부보다 들러리가 더 예뻐 보입니까? 아부도 적당히 해야지"


오경과 미주의 대화에 깜빡이도 없이 껴든 고대리로 둘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아니 고대리님. 제가 옷 사는데 한 푼이라도 보태주셨어요? 왜 아침부터 시비를 거세요?"


기분이 상한 오경이 쏘아붙였다.


"아니 내 말은 오경 씨가 안 예쁘다는 게 아니고 신부보다 더 예쁠 거라 하니 한 말이죠"


"아니 그러니까 신부보다 예쁘든 말든 그건 제 사정인데 왜 고대리님이 지적질을 하시냐고요"


"아니 오경 씨 무슨 말을 그리합니까? 지적질이라니요. 말이 심하십니다. 지금 실수하셨어요"


"실수는 고대리님이 하셨죠. 여직원들끼리 하는 대화에 깜빡이도 없이 껴드셔서 저희 둘을 무시하셨잖아욧"


미주는 본인이 한 말로 시작된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고 아직 출근 전인 사무실 식구들이 들어올까 노심초사하며 출입문과 둘을 번갈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리님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월급 타서 다 뭐 하세요? 일주일 내내 똑같은 옷만 입고 오시는 건 자유인데 세탁도 좀 하고 다니세요"


감정이 격해진 오경이 쏘아붙인 그 말에 미주는 심장이 오그라 들었지만 한편으론 목에 걸려 있던 인절미가 사이다를 타고 쑥 내려가는 통쾌한 기분이었다.


"아니 오경 씨 말이 심하지 않습니까? 이 옷이 이래 봐도 그냥 옷이 아니고 골프웨업니다. 엄청 비싼 거라고요"


미주는 고대리의 말에 웃음이 튀어나올까 봐 입을 막고 책상에 엎드렸고 그 찰나 출근한 손실장으로 대화는 끊겼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오경의 인사에


"어머 이게 누구시더라. 하늘에서 천사 강림한 줄. 오경 씨 오늘 선 봐요? 너무 예쁘다 잘 어울려요"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손실장은 오경의 패션감각을 칭찬하며 본인도 한 벌 장만해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고 그 모습이 내내 못마땅한 고대리는 입술을 삐쭉이고 있었다.




특유의 씩씩한 발소리를 내며 사무실로 돌아온 고대리는 여지없이 믹스 커피 두 봉을 종이컵에 타 지나치게 후후 거리며 마시더니 6시 땡 하자마자 인사도 없이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미주와 오경도 내일을 기약하며 지하철역에서 헤어졌다.


그 시간 기석은 열감기로 앓아누운 박상경 대신 주당역 퇴근길 교통정리를 나가 있었다. 일부러 유이경과 근무 위치를 바꿔 지하철 역에서 올라오는 미주가 잘 보이는 교차로에 서 있었는데 정확히 6시 35분이 되자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미주의 모습이 어둠 속에 나타났고, 기석은 어둠 속에서도 미주의 모습이 아주 정확히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누가 봐도 어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치 작정하고 미주를 좇아가고 있는 듯한 얼굴이 동그랗고 키 작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기석의 가슴은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언니 어디야?"


집으로 가는 길 미리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은 미주는 전화를 받았음에도 마치 옆에서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슈퍼에서 나오던 미리가 미주를 보고 키득대고 있었다.


"아휴 깜짝 놀랐잖아"


"놀라긴 뭘 놀라. 남정네라도 좇아오면 놀라겠지만"


퇴근하는 척 사무실 근처서 대기하다 미주 뒤를 쫓던 고대리는 갑자기 슈퍼에서 나타나 미주와 얘기를 나누는 미리를 보며 남의 집 대문으로 몸을 숨겼다 다시 고개를 내미니 두 여자는 사라지고 휑한 어둠만이 골목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대리는 주변을 기웃거리다 포기하고 터덜터덜 걸어 다시 지하철 역으로 향했고 여전히 교통정리 중이던 기석은 힘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의 얼굴을 정확히 봐 두었다.




박상경을 시작으로 돌기 시작한 열감기가 소주경찰서에 역병처럼 퍼져 나갔고 각 부서마다 기침하는 소리와 앓는 형사들과 경찰들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 감기를 기석도 피해 갈 수 없었고 소주시를 구역별로 나눠 교대근무를 하던 의경팀은 빈자리를 채우기에도 급급했는데 그러던 중 기석은 말년 휴가를 가게 되었다.


"나수경 휴가?"


복도에서 만난 최경장이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라고"


최경장은 순찰차 키를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리며 콧노래까지 부르며 멀어져 갔다.


'최경장 저 새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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