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다녀오신 할머니가 막냇동생을 찾고 계셨다. 아기를 재우려 포대기 안으로 손까지 꽁꽁 집어넣고 아빠의 커다란 잠바로 뒤집어 씌워바깥 마당을 돌던 언니가 할머니의 부름에 안마당으로 들어왔다.
"내 오늘 뭐 따왔는지 보래이"
할머니가 다래끼에서 꺼낸 손수건을 풀자 거기엔 동그란 콩 같은 것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었다.
"할머이 이게 뭔데?"
"이거 약이지"
"누가 먹을 건데?"
"누 먹긴. 니 동상이 묵지"
"나는 동생이 둘인데 두 개니깐 둘 다 먹어?"
"큰 건 안 무도 돼. 쯕은기 무야지"
"그건 어디에 좋은 약인데?"
"이거를 꼬 무믄 침 흘리는 병이 싹 낫는다잖나"
할머니는 잣을 깔 때나 쓰는 다듬잇돌위에 나뭇가지를 얹고 작은 망치로 살살 두들기자 동그란 집엔 노란색 번데기가들어 있었다.
"할머이 이거 벌거지자네"
"이잉 벌거지는 약 이래니"
나는 인상을 잔뜩 쓰며 한 발짝 물러났고 동생을 업고 있던 언니도 눈이 커지며 한 발짝 물러났다.
할머니는 그 번데기 두 개를 은행을 구울 때나 쓰는 스댕 사발에 담아 연탄불 위에 올려놓자 번데기가 깜짝 놀라 덜컹 움직이다 금세 잠이 들면서 노릇하게 구워졌다. 할머니는 사발 구석을 면행주로 집어 번데기를 당신 손바닥 위에 쏟아 내시고 후후 불어 식힌 뒤 아빠 잠바 속에서 잠이 들랑 말랑 꿈틀대고 있던 막냇동생 입에 쏙 넣어 주셨다.
언니는 등에 업힌 막내의 모습을 보려고 고개를 한껏 돌리고 있었고 나는 잔뜩 인상을 쓰고 언니 한 번 막내 한 번 할머니를 한 번 쳐다보았는데 흐뭇하고 뿌듯한 표정의 할머니 눈에는 큰누나 등에 떡 들러붙어 업혀 있는 막내가 또 침을 질질 흘리며 저 멀리 달아난 잠에 다시 반짝이는 까만 눈을 하고 맛있게 입을 오물거리는모습이 비치고 있었고 나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가 이 사실을 아시면 우리는 어떤 처벌? 처형을 받게 될까? 그 걱정뿐이었다.
그 뒤로도 종종 할머니는 그 벌레집을 발견하실 때마다 가지를 꺾어 오셨고 진짠지 우연인지 동생의 침 흘림도 좋아졌다. 그래서 나도 산에서 놀다 벌레집을 발견하면 무조건 챙겨 왔고 내가 그걸 챙기는 걸 아는 동네 친구들도 혹여나놀다발견하면나에게로 달려와 손을 내밀었고 나는마치 금덩이를 주운 것처럼 뿌듯해하며 할머니에게달려가 꼬질꼬질한 자랑스러운 손을 내밀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나서 알았다.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그 열매 같은 것이 풀쐐기의 집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촌에서 나고 자랐지만 풀쐐기에는 한 번도 쏘여보지 않은 운 좋은 소녀였다. 뱀도 한 번 만져보지 않고 물리지도 않았으니 그것도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동네 친구들이랑 산에서 놀다가 풀쐐기에 쏘여 퉁퉁 붓고 진물이 나서 도랑에서 수없이 씻어대던 안타까운 상황들도많았었는데하필 막내가 먹은 것이 그 풀쐐기의 번데기였다니.
그리고 엄마가 되고 나서 알았다.
아이들이 자랄 때 말이 늘고 생각이 커지는 그 시기엔 유난히도 침을 많이 흘린다는 사실을.
축축해진 손수건과 턱받이를 하루에도 수없이 교체해 주면서 너무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막냇동생이 벌레 먹던 모습에 웃음이 났다. 혹시 그 벌레는 부족한 단백질 섭취에 아주 찔끔 도움이 되었을까?
엄마한테 막내가 풀쐐기 번데기 먹었던 얘기를 했더니 이젠 농약 때문인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고 하셨다. 산에서 놀던 친구들도 쇠꼴 베러 간 아버지도 괴롭히던 풀쐐기였지만 풀쐐기도 나름 자기 방어였겠지. 이젠 더 볼 수 없다고 하니 좀 아쉽고 서운도하다.
점점 사라지는 것들.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들.
그 곱던 단풍과 은행잎이 한 번 내린 비에 갑자기 우중충한낙엽이 된 것을 보며 정말 변화도 한순간이구나 새삼 느꼈다.
그 풀쐐기 번데기를 먹었던 막내는 장성한 사십 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었는데 요새도 침 흘리고 사는지 한 번 물어봐야지 ^^잘 때 츄릅 하려나?
그리고 할머니가 산에서 꺾어다 주시던, 먹으면 먹을수록 감질나던, 이젠 거의 사라지고 없는 고염 열매도오늘은 간절히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