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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가을과 겨울 사이

#9. 나수경의 고백

by 별바라기

어제랑 똑같이 인사도 없이 먼저 퇴근한 고대리는 사무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연거푸 담배를 이어 피던 그때 미주와 오경이 사무실 밖에서 헤어지는 인사 소리가 들렸고 미주는 주당역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 뒤를 거리를 두고 고대리가 따라가고 있었다.


고대리는 분명 미주가 집이 아닌 컴퓨터 학원으로 갈 거로 생각하고 쫓았지만, 미주는 지하철에서 내려 학원가가 아닌 주택가로 들어서더니 동네 슈퍼에 들러 비닐봉지를 들고 빨간 벽돌집으로 들어갔다.


'뭐야? 유미주 학원 다니는 거 아니었어? 뭐 매일 가는 거 아닐 수도 있으니 다시 꼬리를 잡자'


고대리는 본인의 확신이 허탕을 친 것에 어이없어 연거푸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구둣발로 뭉갰다. 하지만 그 모습을 고향슈퍼 안주인이 지켜보고 있었고 누가 봐도 참한 미주를 쫓아다니는 총각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저녁 고대리는 여지없이 미주의 뒤를 밟았다. 미주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향해 걸었고 빨간 벽돌집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걷던 고대리는 오늘도 허탕을 쳤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사라졌고, 슈퍼 댁은 이 사실을 미주에게 귀띔을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 재밌는 기분이 들어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아침 출근길. 미주는 이제 정말 보이지 않는 키 큰 의경의 모습에 휴가가 아닌 전역을 했다고 생각하며 왠지 모를 서운함이 느껴졌다. 그동안 내 생각 속에 이렇게 오래 머문 사람이 있었나? 생각해 보니 참 어이없고도 또 한편으론 슬픈 일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뭐였을까? 설마 운명? 인연? 뭐 그런 감정이라면 촉촉한 눈매로 나를 지켜보던 그 사람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너무 어이없고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일상을 이어가던 어느 날 미주는 생일이 돌아오는 오경에게 책선물을 하려고 주당 서점에 들렀다.


"대장님 안녕하셨어요?"


"아이고 이게 누구야? 미주 씨 왜 이제 왔어. 얼마나 기다렸다고!"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주당 서점 대장이 반가움과 아쉬움의 목소리로 미주를 맞아 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있다마다. 내가 미주 씨 기다리다 눈 빠지는 줄 알았잖아"


대장은 작은 상자를 꺼내 미주에게 건넸다.


"대장님 이게 뭐예요?"


"응, 나는 심부름만 하는 거고 그 안에 편지를 넣어놨대. 잘 읽어봐"


"누가 맡기고 간 건가요?"


"응 그것도 비밀. 박스 열어보면 알게 될 거야"


미주는 대장의 웃음에 함께 웃으며 오경에게 줄 시집을 한 권 사고 상자를 든 채 고향 슈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이 층집 아가씨구먼. 오늘은 혼자 오는 거고?"


"예? 무슨 말씀인지?"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내가 주책이지"


고향 댁은 미주에게 알 수 없는 말만 하며 슈퍼 문을 열고 주변을 요리조리 살폈다.


"오늘은 없나 보네"


의아한 눈빛으로 상자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는 미주를 보며 고향 댁이 말을 이었다.


"내가 아가씨한테 말해줄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했는데 오늘은 없는 거 보니 이제 지도 떨어져 나갔나 봐. 요새 따라다니는 남자 있지?"


미주가 까르르 웃으며 "사람 잘 못 보신 것 같아요"


"아니야. 자기 퇴근할 때마다 따라다니던 남자가 있었어. 키가 좀 작고 곤색 나는 바지에 회색빛 나는 잠바를 입고 까만 구두 신고, 아 꼴초인지 담배를 많이 피우더라고"


고향 댁한테 얘기를 들은 미주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생각하기 싫지만 떠오르는 단 한 사람 고대리밖에 없는데 왜 남의 동네까지 따라왔단 말인가? 미주는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미역 한 봉지와 라면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무슨 날인가? 서점부터 슈퍼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네"


미주는 구시렁거리며 유미주 님께 라고 쓰인 상자를 조심조심 열었다.


상자를 열자마자 귀여운 편지봉투가 보였고 그 아래 발타자르그라시안의 '세상을 보는 지혜'와 나태주 시인의 '풀꽃' 책이 들어 있었다. 물건을 확인한 미주는 심장이 뛰었고 그 소리가 본인의 귀까지 들렸다. 그리고 왠지 이 상자를 건넨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추측이 맞았으면 싶었다. 미주는 떨리는 맘으로 편지봉투를 열었다.


유미주 님께


이렇게 인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결례를 무릅쓰고 편지를 전함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는 데 며칠이 걸렸고 이 편지를 어떻게 전하나 고민하는 데 며칠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전역과 맞물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당히 나타나 인사드리지 못하고 주당 서점 사장님 부탁드리고 갑니다.

안녕하세요 미주 씨. 감히 미주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저는 주당역에서 미주 씨가 울던 그날 그 자리에 서 있던, 롯데리아에서 동생분과 버거를 먹던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의경 나기석이라고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미주 씨를 처음 본 그날부터 관심 있었습니다. 전역하는 날 당당히 미주 씨 앞에 나타나고 싶었는데 급한 사정으로 지금 주당 서점에 들러 급하게 편지를 씁니다.

당황스럽겠지만 저는 미주가 맘에 듭니다.

무리한 부탁이지만 연락처 남기니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0123-200-1700 나기석 드림


편지를 다 읽고 난 미주는 머리가 어질 했다. 이 무슨 자다 봉창 같은 고백 편지란 말인가?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미주의 머릿속에 맴돌던 그 사람의 편지라는 것에 갑자기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고 그때 퇴근한 미리가 들어왔다.


"언니 표정이 그래? 건 또 뭐야? 집에서 소포 왔어?"


미리는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편지를 집어 들었다.


"오? 오? 오? 우와? 이거 그때 언니 울렸던 새끼짭새 중 하나잖아. 가만있어봐 옴마! 그 키 큰 잘 생긴 의경? 어쩐지 뭔가 느낌이 예사롭지 않더니만 그 사람이 언니한테 관심 있었나 보네. 그런데 이걸 왜 직접 안 주고 서점에 맡기고 갔대?"


"그거야 나도 모르지"


"언니 전화할 거야? 집 전화 같은데 번호도 죽인다. 좀 사는 집인가?"


"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뭘 어떻게 해. 무조건 질러보는 거지. 아니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고백하고 갔다는 건 언니한테 진짜 맘이 있다는 거잖아. 나 좋다는 사람 왜 밀어내. 어서 옵쇼 해야지. 아 모태 솔로 유미주 드디어 연애 시작하는 것인가?"


손뼉을 치며 장난을 치는 미리에게 미주가 눈을 흘겼다.


"아, 그건 그렇고 미리야. 너 요즘 학교선 괜찮아? 그 학생은 얌전하고?"


"언니 지금 나는 내 싸다구를 갈긴 주원이가 문제가 아니야. 더 심각한 일이 있어"


"뭐야? 그거 말고 더 큰일이?"


"언니 내가 전에 말한 적 있나? 우리 학교 학생부장"


"뭐 맨날 똑같은 파카에 꾀죄죄하고 담배 냄새 풍기는 그 노총각?"


"응. 지금 학교서 그 부장님 하고 나하고 못 엮어서 난리야. 아 미촤 버리겄어"


"엥? 학교 사람들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야? 거의 삼촌뻘이잖아?"


"그러니 내가 미치지. 남교사끼리 퇴근하고 한 잔 했나 봐. 그런데 나한테 호감 있다고 취중에 뱉었대. 그게 소문에 소문을 타고 난리도 아니야. 곧 이러다 우리 둘이 손을 잡았네 뽀뽀를 했네 별의별 얘기가 돌지도 몰라"


"그래도 무슨 교육자들이 그런 말까지 하려고. 그건 너무 갔다."


"언니. 언니가 이 세계를 몰라서 그래. 뭐 옛날에 성인군자들은 밤일도 안 하고 애도 안 만들었냐? 원래 고고한 척 경건한 척하는 사람들이 뒤에선 더 야하고 구리고 그래. 교사들 회식해 봐 진짜 어디 숨어 있던 멍멍이들 많이 기어 나온다니. 신참내기 특수교사에 애한테 쳐 맞고 그래서 막냇동생처럼 아껴주는구나 생각했는데 왜 하필 그런 노총각의 연애 세포를 내가 깨운 거냐고. 나는 키 큰 의경같이 샤프한 남자가 좋단 말이야. 시골 감자 같은 뚱그런 아저씨 말고"


미리의 속사포 절규에 미주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렇다고 너무 싫은 티 내지 말고, 또 기간제라고 기죽지도 말고 네 의사를 정확히 전달해. 같은 직원끼리 얼굴 붉힐 일은 서로 만들진 않겠지만"


"언니 우리 음력 삼월에 뭐 있나 봐. 둘 다 남자가 동시에 꼬이고"


"너 농담이라도 엄마한테 그런 말 흘리지도 마. 기도해 주신다고 득달같이 올라오신다."


"엄마 밥 먹고 싶은데 장난 한번 쳐볼까?"


"어이구 곧 막내 중간고사야. 제발 가만히 좀 있자"


미주가 미리의 코를 잡아 흔들었다.


<10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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