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타던 냄새가 그리운 날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공동 현관으로 나가려는데 밤 새 요란스럽게 분 바람으로 낙엽 무더기가 한가득 들어와 있었다.
"흐미 우짤스꼬 니들 여기서 뭐 하냐?"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을 양발로 밀어내며 갔는데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쏘아진 장풍에 낙엽은 마구잡이로 흐트러지며 본디 모여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두 발로 밀고 있던 낙엽을 몽땅 잃은 나는 빠른 포기로 출근을 재촉했는데 바람이 수놓은 낙엽 레드카펫으로 이쁘긴 했지만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잎을 달고 있던 빼곡한 나뭇가지들은 애처로워 보였다.
"할머이 뭐 해?"
"싱겁긴. 보믄 몰르나 낙앱 쓸지"
"그니까 자꾸 떨어지는 이파리를 왜 또 쓰냐고?"
"보기 숭하고 갈구치이 그라지"
"할머이 봐봐 아직도 나무에 이파리가 저래 많은데 때마다 이걸 다 우뜨케 쓸라 그래?"
우리 집 뒤에는 우리 동네서 가장 큰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었다. 일본 만화영화 이웃집 토토로에 나올만한 진짜 진짜 큰 느티나무인데 할머니가 시집을 오셨을 때도 있었고, 아버지가 어릴 때도 있었고, 내가 태어날 때도 있었고, 내가 시집갈 때도 있었고, 나의 큰아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도 있었으니 나무의 나이는 도대체 몇 살 정도일까?
그러니 나뭇잎 떨어지는 계절이 찾아오면 안마당도 바깥마당도 느티나무 잎들의 놀이터로 변했는데 희한 케도 어른들은 마당서 낙엽이 노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야야 거 누가 있나? 마당에 낙앱 좀 쓸으래이"
연탄보일러 선에 맞춰 누워 등을 지지고 있는데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아 할머이 쫌! 걍 한 번에 쓸자. 번번이 우트케 다 쓸어"
"이잉 자주자주 쓸으야 들 감푸지"
나는 더 이상 말대꾸도 못하고 잠드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한참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코에 익숙하면서 좋은 냄새에 잠이 깼다. 방문을 여니 역시나 마당 한가운데 수북이 쌓인 낙엽이 흰 연기를 내며 천천히 불이 붙고 있었다.
"음 좋은 냄새. 근데 할머이 왜 마당에다 불을 놨어?"
내가 코를 킁킁거리며 낙엽 무더기 앞에 쪼그리고 앉자
"빌나기도 빌나기도. 뭔 언나가 끄신 냄시를 좋다 하는지. 버강지에 다 조느믄 맥힐까 봐 그라지"
할머니가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고 계셨고 나는 그 옆에서 산신령이 나올 것 같은 연기를 마주하며 타는 낙엽을 구경 중이었다.
"윽 냄새, 이거. 무슨 냄새야?"
텔레비전을 보려 방으로 들어가니 동생이 코를 잡았다.
"뭔 냄새는? 암내도 안 나는데?"
나는 양손을 코에다 대며 킁킁거렸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야 ㅇㅇㅇ 너 빨리 나가 씻고 와"
방에 들어온 언니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 왜에?"
"니 또 낙엽 태우는 거 지켜보고 있었지? 니한테 연기 냄새 털컥 들러붙었어. 얼른 나가. 머리까지 깨끗이 감 고 올 거 아니면 방에 들어오지도 마! "
나는 깨갱 아무 말도 못 하고 어슬렁어슬렁 수돗가로 나갔다.
우리 동네엔 아주 귀여운 낙엽 빠방이가 있다. 온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도로에 있는 낙엽을 호로록 주워 먹는데 꽉 찬 낙엽 통을 비우고 있는 것을 운 좋게 목격하게 되었다.
어릴 적 습관 때문인지 낙엽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비질을 하고 싶어진다. 비록 낙엽에 불을 붙일 순 없지만 무더기로 쌓여 있는 낙엽을 본 것만으로도 마당을 가득 채우던 낙엽 냄새가 나는 것만 같고, 더더군다나 상막하게 출근을 당하는 아침에 낙엽 빠방이를 보는 것은 나의 무료한 일상에 반가운 이벤트가 되었다.
할머니의 습관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친정 마당은 풀 한 포기 낙엽 한 잎 놀지 못하고 할머니 말마따나 늘 말꼬로미 정돈되어 있다. 어릴 적 뽑아도 뽑아도 죽기 살기로 올라오는 지겨운 풀을 뽑는 것이 지독하게도 싫고 귀찮았던 나의 그림자도 남아 있고 그런데 재밌는 것인지 어이없는 것인지 어느새 자연스레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마당을 쓰는 현재 나의 모습도 있다.
그러고보니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그래도 나는 낙엽 태우는 냄새가 여전히 좋고 그립다. 아! 그리고 그 어마어마하게 큰 느티나무는 2023년 늦가을 군에서 안전상의 이유로 크레인까지 동원해 베었다. 오랜시간 느티나무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던 친정 지붕은 드디어 모자를 벗었는데 엄청나게 굵은 그루터기를 구경하며 친정의 모든 역사와 비밀들을 품고 있는 나이테가 괜시리 슬프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