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매=그리마-돈벌레
추석날 아침.
병풍을 꺼내는데 휘리릭 순식간에 뭔가 지나갔다.
"어 돈벌레다"
병풍을 움직여 놀란 것인지, 나의 목소리에 놀란 것인지 돈벌레는 순식간에 책장 밑으로 사라졌고
"야 너 거기 드가면 굶어 죽어. 얼른 나와. 내가 밖에 보내 줄게"
돈벌레는 나의 말을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연휴 내내 작은 방에 들어갈 때마다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벌레를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는 나지만 돈벌레 앞에선 한 번 주춤하게 된다. 속도도 속도거니와 그 많은 다리가 주는 리듬감은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뭔가 훑고 지나간 것 같아 등이 스믈스믈 가려운게 견딜 수가 없다. 어른들은 익충이라고 하셨지만 생김새가 마치 용의 후예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돈벌레와 찐한 추억이 있기에 결코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는 존재지만 혹시라도 눈에 띄면 건물 밖으로 살려주고 싶은 맘이 퐁퐁 솟는다.
그날도 산으로 도랑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놀았던 나였기에 초저녁부터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한참 자고 있는 도중 코 밑이 간지러워 손으로 쓴 훔쳤다. 그리고 처음 맡아본 고약한 냄새에 눈을 번쩍 떴고, 코와 잎 주변이 여전히 간지러운 것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번개 같이 일어나 형광등을 켜고 보니 으악! 내 얼굴에 수많은 벌레 다리가 달라붙어 꿈틀꿈틀 춤을 추고 있었다.
수돗가로 달려가 물로 여러 번 씻었지만 냄새가 가시지 않기에 세숫비누까지 칠해 얼굴을 벅벅 닦고 있었다.
"어이구 낼은 해가 스쪽서 뜰라나. 잠꾸래기가 우째 자다 말고 인나 시수를 다 하고?"
열린 문으로 할머니가 내다보시며 말씀하셨다.
"세수는 아까도 하고 잤어. 지금 자다가 뭔 벌개이가 묻어서 씻는기여"
"방에 불을 느서 그리매가 드갔나보네"
"할머이 그리매가 뭐여?"
"그리매? 거 있잖나 다리 많아서 벌벌 거리고 기 다니는 벌개이"
"그 지네 같이 생긴 엄청 빠른 거?"
"오이야. 지주도 좋지. 우째 자다 말고 그 빠른 걸 잡았대"
"내가 잡은 게 아니고 가가 내 얼굴에 지 다리를 다 뿌려놓고 갔어. 아 냄새가 안 없어지잖아"
"방에 가 머리맡에 함 찾아 보래이. 어서 죽어 있나"
나는 할머니 말에 씻다 말고 다시 방으로 번개 같이 뛰어갔다.
방에 들어가니 베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리를 떨군 그리매 사체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책받침으로 그리매를 떠서 마당에 휙 버리고 방에 또 다른 그리매 가족들이 있지는 않은지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어여 불 끄고 자"
할머니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싫어, 오늘은 불 키고 잘 거야. 그리매가 또 오믄 우뜨케"
"안 와. 가도 뭐 먹을 끼 있시야 가지. 오늘은 안 가니 어여 불 끄고 자"
나는 할머니 말을 듣고도 불을 켜 놓고 잤다.
신기하게도 그 뒤로 내 눈엔 그리매가 심심치 않게 띄었다. 벌레가 나타나면 무조건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나였기에 그리매가 보일 때마다 파리채부터 찾았는데 할머니는
"아서, 가가 그래도 돈벌레여. 지가 나가게 내비도"
"할머이도 참. 무슨 벌개이가 돈을 갖다 줘. 얼른 때리 잡아야지"
"가가 그래도 방에 있는 모개이, 포리 같은 벌개이도 잠 묵는 착한 벌개이여"
"엥? 자가 벌거지를 먹는다고?"
"하무, 그라고 냅두믄 지가 기막히게 알아서 기 나가이 내비도. 거 파리채 이리 내 논나. 내 등이나 긁게"
"할머이 등 개루워? 내가 끍어 줄까?"
"그래 션하게 끍어봐래이"
파리채 맞이를 피하고 싶던 빠른 그리매는 이미 진작에 사라지고 없었다.
사무실에 종종 돈벌레가 출몰한다.
언제나처럼 동료들은 꺄악꺄악 소리 지르기 바쁘고 나는 혼자 빙그레 웃는다. 돈벌레는 사무실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들어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혹여 뇌비게이션 오류로 잘못 들어온 것이라면 사무실 바닥 구석구석에 놓여 있는 끈끈이에 들러붙지 않고 부디 잘 탈출하기를 항상 응원한다.
말복 무렵 남양주 지인의 집들이에 갔다가 멋진 카페가 있다고 하여 차를 마시러 갔다. 산속 깊은 곳에 있던 카페는 정말 멋졌지만 4층 건물에서 뿜어져 나간 환한 조명빛에 이끌려 날아왔던 숲의 하늘소와 곤충들이 다시 숲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흔적이 남아 있어 맘이좋지 않았다. 작은 벌레 한 마리도 부디 충분히 제 명을, 삶을 누리다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