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이 전해 지던 동전은 사라지고
"여보 오늘 애들 용돈 주는 날이네"
"싫은데 싫은데 안 줄 건데"
남편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곁에 있던 작은 아이가 아빠를 향해 눈을 흘기고 있었다.
"당신도 클 때 장인어른한테 용돈 받았지?"
"용돈은 무슨 꿈도 못 꿨지. 필요할 때마다 딱 그만큼만 타서 썼어. 그러니 내가 빈병 주우러 동네 쏘다니고 그랬지. 당신은? 아버님한테 용돈 받았어?"
"용돈이 어딨어. 학용품 살 돈도 눈치 보며 간신히 달라고 했는데"
"엥? 우리야 집에 애들이 많아서 그렇다 쳐도 당신은 혼자였는데 왜 눈치를 봐? 그래도 제사 때 고모들 오시고 그러면 용돈은 주셨을 거잖아?"
"우리 집안엔 용돈 주고 그러는 문화가 없었어. 설날에 세뱃돈 정도. 그것도 엄마가 맡아준다고 다 뺏기고. 우리 애들 크면서 용돈 문화도 있구나 알았지. 그래도 나에 비하면 당신은 할머니가 주시던 백 원이 있었잖아. 그게 용돈이지 뭐"
"맞네. 그랬네. 나도 용돈을 받으며 컸어"
"할머이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오이야, 잘 댕기온나. 야나~"
할머니가 허리춤에 있는 전대주머니를 열어 우리에게 따뜻한 동전 한 개씩을 손 위에 얹어 주시면 나는 어깨에도 가슴에도 행복한 바람이 빵빵하게 충전되어 두둥실 발걸음으로 학교에 갔다. 백 원짜리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혹시나 잃어버릴세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었다, 하루 종일 만지작 거릴 때면 하루가 어찌나 긴지, 얼른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기 전 학교 앞 가겟방에 들러 한참 전부터 침 흘리고 있던 수염 긴 제기랑 딱지를 사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었다.
어릴 적 드라마를 보면 학교 다녀와서 숙제를 하는 아이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와 간식을 챙겨 주는 도시엄마. 아이에게 이번 주 용돈, 이 달 용돈이라며 봉투에 담아 건네는 도시엄마를 보며 나는 그런 도시 엄마가 없어서 불공평하고 불행하다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내가 엄마가 되었어도 그런 광경은 만들어 내지 못했다. 아이가 어렸을 땐 책상을 버리고 거실을 점령하고 살은 데다 가족 합의하에 지정액 지급이 아닌 용돈을 버는 만큼[예습 복습 1시간 1,000원, 설거지 1,000원, 빨래 널기 1,000원, 청소기 밀기 1,000원, 분리수거 1,000원, 양가 할머니 댁에 안부전화 걸기 3,000원(단 1주일에 2번까지만 인정)] 벌어서 지급했기에 손으로 건네지 못하고 냉장고에 붙은 자석 개수만큼 아이들 통장으로 입금을 해 주었었다. 그러니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용돈의 짜릿한 맛은 느낄 수가 없었고, 나에게 산소통 같았던 백 원짜리 동전은 아이들에겐 큰 가치 있는 현금은 아니었다.
"나 오늘 출근하다가 백 원 줏었지롱"
저녁을 먹으며 자랑하는 내게
"엄마 저번에도 CU 앞에서 삼백 원 주웠다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동전 같은 거 함부로 줍지 말래요. 위생도 위생이지만 누군가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버리는 일도 있대요"
"그렇담 담부턴 동전을 주우면 퉤퉤퉤 하고 주머니에 넣을게"
나의 농담에 큰 아이가 웃었다.
산에 있던 약초가 둔갑했던 백 원짜리 동전.
들에 있던 나물이 둔갑했던 백 원짜리 동전.
넷이나 되는 손주들을 위해 전대주머니에 늘 동전을 품고 계셨던 할머니가 문득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같은 동전을 쓰고 있지만 화폐 가치가 달라졌으니 요즘 아이들에겐 동전의 설렘보다는 지폐의 색상에 따라 설렘도 다르겠다 싶다. 가끔 편의점이나 무인마켓에서 만나는 어린아이들도 전부 익숙하게 카드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시어머니 다니시는 경로당에선 예전 십 원 짜린 묵직한 무게감이 있어 대접을 받지만 요즘 발행되는 작은 십 원 짜린 같은 가치여도 대접을 못 받는다 하여 나는 이웃 엄마들에게 부탁해 집집마다 잠들어 있는 묵직한 십 원짜리 동전을 모아다 갖다 드린 적도 있었다.
우리 집엔 식구들이 거스름 동전이 생길 때마다 담아두는 동전통이 있는데 묵직해졌기에 여행통장에 입금을 시켰다. 동전을 들고 은행에 가면서 이 뭉터기를 할머니 전대 주머니에 채워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진짜 타임머신이 있다면 백 원짜리 동전도 동전파스도 틀니세정제와 뉴케어 드링크, 쁘디첼을 할머니 방 앉은뱅이 상 위에 몰래 놓아 드리고 오고 싶다는 상상을 해 본다. 오늘 밤 꿈속에서라도 그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