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의 발전사는 의외로 단순하다. 0.1%도 안 되는 천재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0.9%도 되지 않는 통찰력 있는 이들이 그것에 협조함으로써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그리고 대부분 99%에 해당하는 나와 같은 대중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열매의 단맛만 즐길 뿐이다. 하지만 이 평범한 구성원 중에 잉여인간도 존재한다. 몇 % 인지는 몰라도.
[... 지적 야만인이 아니라 인성을 갖춘 참 인간이어야 한다.
비록 현실에 살고 있지만 치열한 성찰을 통해 -장구한 역사 속에서도 살아남은 오래된 생각과 대화하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
더 공부하고, 더 이해하고, 더 깨닫고 싶은 심정으로...]
대구 모 대학 총장이 쓴 글의 일부다. 며칠 전 우연히 이 글을 읽는 순간, 깊고 맑은 <댕~~~ >하는 종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만큼 살아오면서 내 내면에서 울리는 이런 종소리를 몇 번 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래봤자 손가락으로 세릴 정도지만.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때마다 그 종소리는 내 삶의 변곡점을 알려주는 시그널이었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며칠 째 새벽마다 잠에서 깨 뒤척인다. 심신이 피폐해서 잠을 설치는 것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데... 또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른 송학가루를 홀로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산책길에서 잠시라도 멈출 양이면 도무지 그 상념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어제 벽을 바라보고 자작하며 마신 술도 도통 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취할 수 없다는 것만큼 불행한 것은 없다.
내가, <그 일>을 결정하면... 능히 감당하고...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치기 어린 젊은 시절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그의 사상과 행동을 눈여겨본 때가 있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을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도 자문하지 않습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라는 현란한 말에 마음이 동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문득 모두가 다 꼭 조르바 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알량한 자존심이 태클을 건 것이다.
자신의 천성에 맞게 살아가는 것도, 자유로움을 대표하는 조르바만큼이나 또 다른 자유로움의 모습이 아닐까?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사흘 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부활을 이뤄냈다.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헬렌 켈러는 그의 자서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것들로부터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를 찾아냈다. 그럼 지금 내게 사흘이란...
이상주의자이면서 복잡한 여러 문제 -불의와 어리석음 등-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결국은 효과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 햄릿일 수는 없다. 온종일 먹고 마시고 즐길 것에만 관심을 갖고, 세속적인 얇은 소유물에 만족하고, 생물학적으로 오래 살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잉여인간 일수는 없다.
사회에 어떤 역할도 못하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 잉여인간이다. 그러나 이렇게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잉여인간은 룸펜이다. 루저다. 덤이다. 그나마 에둘러 말하면 ‘이쁜 쓰레기’다. 겉은 멀쩡하지만 딱히 쓸모없는 존재다.
나는 지금 거대한 철문 앞에 서있다. 얼마 전 읽은 그 대학 총장의 글이 날 이곳으로 오게 했다. 그 글이 초대장이 되었고 맵이 되었다. 여기 온 이유는 지혜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다. 이 문 앞에 오기까지 몇 날며칠이 걸렸다. 문을 두들기기 위해 주먹을 쥐고 손을 든 순간 멈칫하고 만다. 거창한 통찰력까지 바라지 않는다. 선구적 안목까지도. 다만, 방향만을 알고 싶은 뿐이다. 옳게 가고 있는지...
사흘만 더 생각하자.
몇 해 전 우연히 읽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요나스 요나손 作)이라는 책이 있다. 100세 생일날 양로원 창문을 넘어 도망친 알란이라는 노인은 특별한 재능이나 원대한 포부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오늘 위스키 한잔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위대한 업적을 만들고 싶어서 체계적이고 계산하는 성격도 아니다 그저 단순하게 눈앞에 놓인 것에 오히려 무심하게 산다.
잉여인간이기는 싫어도 무심한 삶은? 고려해 볼만 하지 않을까, 하는 타협안을 스스로에게 해 본다. 단 사흘이다. 그날이 되면 나는 문을 두들길 것이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햄릿이기를 거부하는 거다. 알란이 창문을 넘었던 것처럼, 나이를 잊고 과감히 또 광야에 서겠다는 거다.
그 광야가 대개 건조하고 사람이 살기 힘든 불모의 땅이라고 단정하지 말 것이다. 그 광야는 종살이하던 곳에서부터 탈출한 시발점이다. 시험과 시련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절대자와의 친교의 장소로서 그의 보호와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훈련의 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좀처럼 물에 잠기지 않던 경주 보문호수 징검다리다. 인생도 그렇다 이렇게 바짓가랑이 걷어 올리고 가야 할 날이 종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