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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천 Mar 05. 2023

기술 발전의 이면

멋진 신세계

  올해 2번째 고전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작품 <멋진 신세계>는 1932년 발표된 작품으로,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미래 사회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미래 소설이다. 1930년대에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현실성이 인상적이다.


  책에서, 인간은 더 이상 임신을 하지 않는다. 대신 태아 인공 수정으로 필요한 숫자만큼의 인간을 만들어낸다. 또한 계급이 나눠져 있고, 계급별로 하는 일이 다르다. 계급대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태아들의 성장 환경을 조작해 높은 계급은 똑똑하고 신체 능력이 우수하게, 낮은 계급은 머리가 나쁘게 만든다. 


  이런 사회에서 제 1목적은 안정이며, 사람들이 불만 없이 그들의 삶에 순응하게 하기 위해 여러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소마'라는 묘약이 존재하는데, 그 어떠한 부작용도 없이 술과 마약을 한 것과 같은 고양감을 누릴 수 있다. 또 만인은 만인의 것이라는 믿음 아래 완벽한 자유연애가 이루어진다. 매일매일 1차원적 욕구의 충족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바보들의 천국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이러한 문명이 닿지 않은 야만국 출신의 청년 존이 문명국에 방문하면서, 이 사회에 약간의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과연 존은 문명국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변화시킨다면 어떤 방식으로?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하는,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던 책이었다.





"우리는 또한 계급을 미리 정하고 조건반사적 습성을 훈련시킵니다. 우리는 사회화된 아기를 내놓습니다. 알파 계급 또는 엡실론 계급을 내놓아 장차 하수구 청소부로서 아니면 미래의...." 그는 미래의 "세계총통"이라고 말할 예정이었지만 정정해서 미래의 "인공부화소장"이라고 말을 맺었다.


-> 태아 인공 수정을 자행할 뿐 아니라 계급대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태아들의 성장 환경을 조작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가 궁금해진다.


감정이란 욕망과 그것의 충족 사이에 게재된 시간 속에서 고개를 드는 법이다. 그 시간 간격을 단축하면 과거의 필요 없는 장애는 모두 제거된다."제군들은 행복한 거야." 총통이 말했다. "제군들의 생활을 감정적으로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여하한 수고도 아낀 적이 없었다. 될 수 있는 한 어떤 감정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이 구절을 보고 있자니 독재 정권의 3S(sex, sports, screen) 정책이 떠오른다. 1차원적인 쾌락으로 쉽고 빠르게 욕구를 충족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는 단순하고 무력한 사람이 된다. 반면 항상 부족함과 결핍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발전에 힘쓴다. 방학도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랐는데, 나는 과연 1차원적 쾌락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식은 죽 먹듯 새로운 개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일세. 우리가 원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이단적 행위는 단순한 한 개인의 생명 그 이상의 것을 위협하거든. 다시 말해서 그것은 사회 자체에 타격을 주는 것이지. 바로 사회 자체에게."


->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고려하지 않는 모습이다. 인공 생식을 통해 원하는 모습의 인간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사회이기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개인은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존엄성을 무시하는 사회라니, 너무나 모순적이다.


시간이 지나갔다. 성공했다는 생각이 버나드의 뇌리를 스쳤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이제까지 불만스러웠던 세계와 완전히 타협하게 되었다. 세계가 그를 중요한 존재로 인정하는 한 세계의 질서는 훌륭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으로 인해 세계와 화해는 되었지만 버나드로서는 이 질서에 대해 비판을 가할 특권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 성공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운 좋게 성과를 냈을 때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다. 뚜렷한 주관 없이 자신의 위상이 격상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과 타협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하는 것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는 이유로 비판을 가한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전형적인 속물이다. 내 주위에는 이런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

친구라는 것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덕에게 가하고 싶지만 가할 수 없는 벌을(보다 온건하고 상징적인 형태로) 그로 하여금 받도록 할 수 있다는 점이다.


-> 물리적, 정서적으로 가깝다는 것은 그만큼 선을 넘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친구와 갈등이 있었는데, 화를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말을 조금 함부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아끼고 존중해 그들이 내 곁을 떠나가지 않도록 하자.


"사회의 불안정이 없이는 비극을 만들 수 없는 것이야.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단 말일세.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아. 그들은 잘 살고 있어. 생활이 안정되고 질병도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도 격정이니 노령이란 것을 모르고 살지. 모친이나 부친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아. (중략) 델타 계급들이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를 기대하다니! 그들이 <오셀로>를 이해하기를 기대하다니! 정말 자네답군!"


-> 매우 공허해 보이는 사회이다. 그저 1차원적인 욕구 충족에 만족하며 산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면서 얻는 성취감을 아마 저들은 평생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게 행복한 삶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된다.


"불쾌감을 안겨주는 것이면 참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모두 제거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중략)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변화를 위해 눈물이 따르는 그 무엇일 것입니다." 하고 야만인은 말을 계속했다. "이곳에는 희생을 치를 가치가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 기술의 발전으로 불편함이 없는 사회는 과연 이상적인 사회일까? 원하는 것은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기에 고통도, 인내도, 희생도 필요 없는 그런 사회 말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큰 대가가 따르는 일에는 그만한 보상이 있다. 희생을 할 수 없다는 건 야만인의 말대로 가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안락함과 즐거움 외에도 추구해야 할 가치가 많음을, 이 작품을 통해 배워간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마치 두 개의 느긋한 나침반의 바늘처럼 그 다리는 오른쪽으로 회전했다. 북, 북동, 동, 남동, 남, 남남서. 그러다 다시 몇 초 후에는 전처럼 서서히 왼쪽으로 회전했다. 남남서, 남, 남동, 동....


-> 야만인의 자살을 암시하며 책이 끝이 났다. 책을 통해 과학만능주의에 빠지는 것은 위험함을 느낄 수 있었고, 행복과 성취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다. 기술의 발전이 어느 때보다 빠르고 파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윤리성은 차치하고서라도, 행복을 위해 자유를 통제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 나온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실은 소마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힘들며, 여가 시간이 늘어도 할 게 없어 무력감에 빠진다. 식욕, 성욕과 같은 1차원적 욕구의 충족만으로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목표를 세우고 이를 이뤄나가는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 그리고 하나의 성취가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인 것 같다.



  또 과학 기술의 발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과학만능주의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세계는 유래 없이 빠르고 파괴적으로 기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는 분명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부분도 있지만, 기술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사회적,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독가스, 다이너마이트 등이 전쟁에서 몇 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던 걸 생각하면, 이는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될 문제이다. 따라서, 발전된 기술의 도입 이전에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치고 적절한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과학 기술은 양날의 검임을 우리는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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