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이번에 소개할 책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다. 우리나라에선 과거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었는데, <Norweigan wood>라는 원제에 맞게 현재는 <노르웨이의 숲>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인데, 원체 유명한 작가의 대표작을 읽는 것이다 보니 기대가 많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크게 두 가지가 눈에 띄었는데,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굉장히 입체적이며 묘사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주인공은 다양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영향을 주고받는데, 각 인물들의 성격이나 특징이 직, 간접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어 서사를 따라가기 용이했다. 또, 적재적소에 좋은 비유들이 많았다. 비교적 단순하고 직관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표현들에 감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생각뿐이다. 그리고 나오코에 대한 기억이 내 속에서 희미해질수록 나는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적인 존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이미 갖추어졌고, 그런 사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 열일곱 살 5월의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잡아챈 죽음은, 바로 그때 나를 잡아채기도 한 것이다.
반딧불이가 사라져 버린 다음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속에 오래오래 머물렀다. 눈을 감으면, 그 작고 희미한 불빛은 짙은 어둠 속을 갈 곳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고 떠돌았다. 나는 어둠 속으로 몇 번이나 손을 뻗어 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이상한 말이지만, 시합하면서 주변을 살피노라면 누구랄 것도 없이 똑같이 뒤틀린 듯이 보이는 거야. (중략) 우리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그 뒤틀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고. 사람마다 걷는 버릇이 다 다르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 보는 방식이 다른데 그것을 고치려 한들 쉽게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고치려다가는 다른 부분마저 이상해져 버린다고 말이야.
"가장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는 거야. (중략)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꼬이고 또 꼬여도 절망적인 기분에 빠지거나 다급한 마음에 억지로 끌어내려 해서는 안 돼. 충분히 시간을 들인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나가야 해. 할 수 있겠어?"
네가 매일 아침 새를 돌보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나의 태엽을 감아.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고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와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난 대체로 서른여섯 번 정도 태엽을 감아. 자, 오늘도 하루를 잘 살아 보자고 하면서.
이윽고 꿈도 없는, 무거운 납으로 된 문 같은 잠이 내려왔다.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중략)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 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책은 이런 구절로 마무리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거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