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세조 13년 7월 14일, 유자광은 세조의 어찰을 지니고 다시 전선으로 가게 되었다.
세조는 도총사 이준에게 보내는 서찰을 통해 속전속결을 지시하였다.
유자광은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며 청하였다.
"이번에 북방의 전선에 가면 반드시 큰 전투가 벌어질 터인데 저도 참전하여 역적의 목을 바쳐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싶습니다!”
세조는 유자광을 격려하고, 전투에 쓸 말과 갑옷을 하사하였다.
유자광은 임금이 하사한 말을 타고 북방의 전쟁터로 달렸다.
세조 13년 7월 14일의 실록 기사에 의하면, 유자광을 북방의 전선으로 보낸 세조는 유자광을 장차 나라의 재목으로 쓰기 위해 예조에 명하여 벼슬길을 터주도록 허통(許通)을 명하였다.
허통은 서얼들의 과거 응시를 제한해 관직 등용을 차단하는 제도를 풀어주는 것을 말했다.
도총사 이준은 속전속결을 지시한 임금의 서찰을 유자광으로부터 전해받고, 총공격령을 내렸다.
유자광이 출전을 자원하니, 이준은 유자광에게 하층민 위주로 편성된 부대인 파적위(破敵衛)를 거느리고 출전하게 하였다.
‘적을 격파하는 부대’라는 이름의 파적위는 지리적으로 산악 지대가 많은 조선의 자연조건에 비추어 보병의 확충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세조가 새로이 설치한 보병부대였다.
관군이 모든 힘을 집중하여 총공세를 퍼붓자 반란군은 버티지 못하고 전선에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관군은 기세를 몰아 압박하여 이시애의 반군과 거산현(居山峴)에서 마지막 결전을 치르게 되었다. 이시애는 지형이 높고 험한 만령(蔓嶺)에 웅거 하여 2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맹렬히 저항하였다.
이준이 총통군으로 적진을 공격하여 적의 기세를 꺾어 혼란하게 하고, 산악 지형을 잘 아는 함길도 출신 겸사복들로 하여금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적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도록 하였다. 하지만 총통군은 적진에서 활과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자, 정신을 못 차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 높이 쏘기도 하고 혹은 가로질러 쏘기도 하여, 제대로 적진에 맞히는 일이 없어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준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군사를 쪼개어 동쪽 산봉우리를 돌아 적이 포진하고 있는 산봉우리의 좌측 진(陣)에 돌격하게 하였다.
좌대장 어유소는 정예군을 차출해 풀과 구분하지 못하도록 푸른 옷을 입혀 위장을 한 후, 배에 태워 산봉우리 뒤쪽으로 상륙시켰다. 어유소의 군사는 벼랑을 따라올라 접근하여 기습적으로 적의 배후를 쳤다. 드디어 유시(酉時, 저녁 6시경) 경 토벌군이 적진의 허를 찔러 한쪽 면(面)을 돌파하였다.
반란군은 당황하였고 이에 토벌군은 고함을 지르며 군사들을 몰아 공격해 올라갔다. 군사들은 북을 둥둥 울리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돌격을 하니, 함성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드디어 관군이 일제히 산 위의 적을 크게 쳐부수니, 살아남은 적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시애는 야음을 틈타 말을 타고 도망하였다.
유자광이 달아나는 이시애와 반란군을 추격하였으나 이미 어두워져, 이준은 징을 울려 관군의 추격을 중지시켰다. 실록에 의하면, 이시애를 끝내 잡지 못했지만 치열하게 전투를 한 유자광은 땀에 젖은 투구를 한 손에 벗어 들고 한 손으로는 부대의 기(旗)를 높이 들어 외쳤다.
"사람이 천지간에 남아로 태어나고, 미천한 몸으로 주상전하의 지극한 인정과 은혜를 입었다. 몸이 변방에서 전투 중에 죽어, 시체가 말가죽에 쌓인 채 고향에 돌아가 묻히지 않는다면 어찌 장부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토벌군은 함길도 만령 전투에서 수륙양면작전을 사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만령 전투를 묘사한 내용은 고려에서 조선까지 함경도 지역에서 무공을 세운 일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설명해 놓은 그림첩인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에서 볼 수 있다. 북관유적도첩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토벌군이 반란군의 주력부대를 무너뜨리자, 이시애는 길주와 경성(鏡城)을 거쳐 국경 넘어 여진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부하들의 배반으로 관군에게 넘겨졌고,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이로써 이시애의 난은 3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유자광은 군대와 함께 함길도에 머물면서 남은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지역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유자광은 포로로 잡힌 반란군과 함길도 백성으로 반란군에 가담한 자들을 여러 명 취조해 보았다. 그들은 그동안 부임해온 고을 수령들에게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국경지역이라는 특수성으로 고을 수령은 오랑캐 침범에 대응할 수 있는 무장출신들이 부임하였고, 이들은 법을 엄하게 다스려 백성을 죽이는 것을 오랑캐 죽이듯 쉽게 생각하여 원망이 골수에 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즈음 명나라는 만주의 여진족 토벌을 위해 조선이 합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세조는 강순과 남이 등에 명하여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의 본거지를 치게 하였다.
유자광은 여진족 토벌을 위해 강순의 휘하 장수로 편입되었다. 유자광은 압록강변인 평안도로 나가기 위해 함길도를 떠나면서 지금까지 현지에서 보고 느꼈던 것을 임금께 보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유자광의 상소는 세조에게 ‘절세의 인재를 얻었다’는 믿음을 주었다.
세조 13년 9월 4일의 실록에 의하면 유자광이 함길도에 있다가 장차 평안도로 나가면서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유자광의 상소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신(臣)이 유규의 얼자로서 만 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지난 6월 역적 이시애의 일에 대해 상소를 올렸더니, 전하께서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특별히 등용하시어 하루아침에 품계가 4품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전하의 큰 은혜에 오직 감격할 따름입니다.
이제 엎드려 듣건대, 겸사복 박의생이 가지고 온 어찰에 신은 강순을 따라 여진을 토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신이 나라를 위하여 칼을 들고 적을 크게 호령하려는 마음은 죽은 다음에야 그치기를 원합니다."
유자광은 왜 함길도 백성들이 쉽게 반란군 진영에 가담하게 되었는지 조사한 바대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이 함길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자세히 살피면서 그들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답을 구하였는데, 지금 신이 함길도를 떠나므로, 감히 상소를 올려 멀리서 성총(聖聰)을 어지럽히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헤아려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시애가 비록 길주의 수령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수십 고을의 백성들이 다투어 수령과 향리를 죽이고 이시애를 따라서 반란에 참여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함길도는 산천이 험하고 막히어 조정의 풍습에 대한 교화가 미치지 못하고 경계가 야인(野人)과 닿아있어 민속도 매우 어리석고 미혹한데, 현명한지 아닌지를 가리지 아니하고 모두 무인으로써 고을 수령을 삼았습니다.
그들은 무장으로서 비록 말을 달리고 칼을 써서 오랑캐를 죽이는 일에는 능하여도,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며 효도와 우애의 도리를 어찌 가르칠 줄 알겠습니까? 죄인을 기분대로 쉽게 죽이고 백성들을 보기를 흙이나 돌같이 하니, 백성들이 수령을 보는 것도 또한 원수와 같이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일개 역적이 지휘권을 도둑질하니 수십 고을의 백성들이 메아리처럼 응하여 평소 고을 수령에 대한 원망을 갚으려고 하였습니다. 어찌 이들 모두가 애초부터 반역하려던 자들이었겠습니까? 이것은 역적이 백성들의 원망을 이용하여 도적의 계책을 행한 까닭입니다."
유자광은 이 문제에 대해 그동안 생각한 대책도 아뢰었다.
"원컨대 지금부터라도 수령을 임명할 때는 만약 큰 고을인 주·부(州·府)이면 활과 칼을 감싸고 다스릴 수 있는 덕을 갖춘 무인을 택하여 수령으로 삼고, 문과급제 출신을 수령의 부관으로 백성의 잡다한 송사를 처리하는 판관(判官)으로 삼으며, 만약 작은 고을인 군·현(郡·縣)이면 문무의 자질을 겸비한 자를 골라 수령에 임명하여야 한다고 사료됩니다.
판관이 되는 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도리를 가르치고, 목사가 되는 자는 활과 칼 등 전투의 기술을 가르치고, 관리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들이 관리를 부모처럼 여긴다면, 변경을 방어하는 계책을 얻을 것입니다."
유자광은 이어서 세조가 각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총통군에 대해서도 아뢰고, 상소를 마무리했다.
"주상께서 군사를 훈련하여 기른 것이 지금까지 12년으로, 병사들은 용감하고 무기는 단련되었습니다. 신이 거산(居山)의 싸움에서 그 장대한 기운이 스스로 배나 되고 충의의 기운이 세차고 꿋꿋한 것을 보았는데, 옛날에 훌륭한 장수와 병졸도 이보다 더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총통군은 시정잡배나 병사들 중에서 충원하는데, 화살과 돌이 종횡으로 날아다니면, 수족이 거꾸로 놓이고, 총통포의 약실에 화약을 재는 것도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며 높이 쏘기도 하고 혹은 가로질러 쏘기도 하여, 한 개의 화살도 바로 적진에 맞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하니 적진을 함몰시키는 데는 총통이 최고이지만, 일백 개의 총통을 일제히 발사한다고 하더라도 적진을 함락시키는 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총통의 군졸을 미리 뽑아서, 평상시에 총통 쏘는 것을 익히고 훈련하여서, 위급할 때 제대로 활용할 것에 대비하소서."
(다음 편에 계속)
(사진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