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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차, 그리고 나의 두 번째 인생

by 두류산 Mar 21. 2025

 정동회에 가는 날이다. 커피와 클래식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이는 자리. 봄이 다가오건만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단단히 채비했지만, 마음은 가볍다. 요즘 생활이 더없이 충만하다.


 얼마 전 시 모임에 가입했다. 첫 시를 발표하는 순간, 선생님의 따뜻한 한마디가 마음을 적셨다. "첫 시인데 참 좋네요." 그 말이 가슴에 스며들 즈음, 뒷자리에서 툭 던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첫 시일 리가 없어. 척 보면 알지."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있을까. 어쩌면 누구나 마음속에 시를 품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시도 오래전부터 자라고 있었던 게 아닐까.


 클래식 모임, 문화탐방 모임, 독서 모임, 그리고 새로 가입한 시 모임까지. 은퇴 후 삶이 풍요롭다. 잔잔한 클래식 선율에 몸을 맡기고 컴퓨터를 켜며 창조의 바다를 건넌다. 생각은 글이 되어 나이테를 새기고 배움은 지혜의 나무를 푸르게 한다. 올라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꽃을 이제야 천천히 바라보는 기분이다. 하루가 짧다.


 안양공방에 도착하니 회장님이 보이차를 끓여주신다. 따뜻한 차 한 모금에 몸이 노곤해진다. 이제 클래식을 감상할 시간. 오늘의 곡은 베를린 필이 연주하고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에로이카)이다.


 첫 음이 울려 퍼지자 강렬한 에너지가 온몸을 휘감는다. 운명에 맞서는 영웅의 외침 같다. 이어지는 선율은 혼돈과 고뇌, 그리고 극복의지를 담아낸다. 거대한 인간 드라마가 펼쳐진다. 베를린 필의 웅장한 사운드는 정교함과 폭발적인 힘을 동시에 지닌다. 빠른 템포 속에서도 모든 악기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치밀한 조화를 이루고, 그 속에서 역동성이 분출된다. 어느새 허리를 곧추세우고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곡은 원래 나폴레옹을 위한 작품이었다. 베토벤은 그를 자유와 평등을 수호하는 영웅이라 여겼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자 실망과 분노에 휩싸여 원래 제목이었던 ‘보나파르트’를 지우고 ‘영웅’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정작 이 곡이 그려낸 영웅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청력을 잃고도 운명에 맞서 위대한 교향곡을 탄생시킨 베토벤 자신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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