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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제 Jan 26. 2024

카페에서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먹는다는 것

나만 알고 싶은 행궁동 카페

일본에서는 카페(cafe, カフェ)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라면 거의 다 식사 메뉴를 판다. 커피 같은 음료와 디저트류를 주로 판매하는 우리나라의 카페와는 살짝 다른 개념이다. 팬에 무언가를 볶고 굽고 달구는 냄새가 나는 일본의 카페들을 좋아한다. 맘에 드는 동네 카페들을 도장 깨기 하듯 방문해 이 가게의 인기메뉴를 물어보고 끼니를 채우는 일은 유학생활 중 작은(아니 제일 중요한) 취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아무리 일본어 공부를 해도 남의 나라 음식이나 식재료의 이름들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 메뉴판을 펼칠 때마다 그래서 너의 이름은! 이라고 묻고 싶은 기분이 된다. 비록 일본어 메뉴만큼은 잘 읽지 못하는 비루한 유학생이었지만 오므라이스에는 언제나 후와후와(ふわふわ: 폭신폭신)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었던 기억이 난다. 폭신폭신 오므라이스나 일본풍으로 재해석한 멘타이코(명란) 파스타를 주문해서 먹는 일이 그렇게도 좋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한국의 국민소득은 더욱 올라 있었고 성수동이니 어디니 하는 곳들에 핫플이 부쩍 많아졌다더라. 텐동, 일본 가정식 등 현지에서 먹었던 메뉴들을 그대로 먹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의 오래된 가게들이 주는 작고 소박한 느낌은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주인장들의 진지하고 어딘가 그윽한 눈빛도.


그러던 중 결혼하여 연고도 없는 수원에 이사를 왔고 행궁동에 맘에 드는 카페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너무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지만 이미 너무 유명해진 같아서 그냥 이름은 그대로 공개하려고 한다. '카페 그루비'라는 곳이다.




남편과 행궁동을 배회하던 어느 여름날 카페를 찾다가, 간판도 없고 불빛도 거의 새어 나오지 않는 작은 가게가 문득 눈에 띄어 들어갔는데 문을 여는 순간부터 이 공간의 모든 것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마다 조용히 속삭이며 대화하거나 책을 읽는, 혹은 아이패드로 작업을 하는 손님들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완전히 다른 세계로 초대된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이곳엔 기품 있는 묘르신과 풍채가 좋은 검은 개 한 마리가 있었다. 하나의 우주를 완성하는 아름다운 생명들, 그리고 음악. 스탄 갯츠와 빌 에반스, 쳇 베이커의 바이닐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내 평생 그러모은 취향을 그대로 구현한 것 같은 놀라운 곳이었다. 가짜가 난무하고 판에 박힌 인테리오로 점철된 서울의 여타 핫플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든 물건 하나하나에 진정성이 가득 담겼다.




카페에서 무언가 달달 볶아지고 구워지는 그런 따뜻한 냄새와 소리좋아하는 나에게 이곳은 그리움의 장소 같았다. 본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카페'라는 곳은 어쩐지 차가운 구석이 있지 않나. 에스프레소 기기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면모 하며. 그런데 이 공간에서는 무려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판다! (쇼와시대를 연상시키는 나폴리탄 스파게티는 일본의 카페에서 식사를 한다면 꼭 먹어봐야 하는 필수 메뉴다...)



아무튼 주방에선 팬에서 모락모락 연기까지 나며 따뜻한 요리를 준비하고 있고, 손님들은 공간에 대한 존중을 담아 목소리를 낮춘다. '조금은 조용히 즐겨주세요'라는 메뉴판의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사장님, 꼭 그렇게 할게요... 주인장의 명령 아래 납작 엎드리게 되는 마법. 역시 권위는 분위기에서부터 풍겨오는 것이다.



최근에 방문했을 때는 이번 시즌 개편 메뉴인 딸기 프렌치토스트를 주문했다. 아가베 시럽에 폭신한 토스트를 찍어 상큼한 딸기와 함께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따뜻한 빵과 차가운 과일이 어우러진 음식의 완벽한 온도가 너무 좋다. 게다가 폭신함과 달콤함의 조화란. 오랫동안 그리워해오던 무언가를 다시 만난 기분이다.



카페 그루비 메뉴 이미지(분위기에 취해 직접 찍지는 못하였다...)


2014년, 일본 히로시마현에 위치한 작은 항구도시 오노미치에서 먹은 음식 생각이 난다. 나는 분명 차가운 걸 (아이스크림 파르페) 주문했는데 주방에선 무언가 달달 볶아지고 있고 따뜻한 향기가 난다며, 사랑스러운 온도의 음식이 나올 것을 기대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던 20대 초반의 나.


카페 그루비에 앉아있으면 그 시절 혼자 여행하던 자신이 소환되고 그와 연관된 온갖 추억과 냄새들이 떠오른다. 볶은 사과 토핑과 바나나의 보드라운 파편, 블루베리 마리, 그리고 귀여운 푸딩과 무민 쿠키까지도.


2014년, 오노미치의 아이스크림 파르페


그 시절에 운영하던 블로그 이름은 '유랑할 틈새'였는데, 이 이름도 오늘 문득 다시 떠올랐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인용한 것이고 너무나 좋아했던 문장이다. 아마 이 이름을 글의 제목이라든지 내 인생의 테마로 재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시절은 온전히 그 시절의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살다가 가끔씩은 유랑할 틈새를 만들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쉬는 날엔 종종 따끈한 음식을 만들어주는 카페에 가면서 말이다.



"유랑할 틈새. 나는 그 말이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간혹 그렇게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터프한 것인지 섬세한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그러나 아무튼 에너지에 넘치는 사람이었다. 낭만주의자였다. 내게 없는 것만 가지고 있었다."

"언어가 기호 같았다. 기호이기에, 그렇게 쉽사리 입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리라. 소중한 것은 무엇 하나 말하지 못한 채."

에쿠니 가오리,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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