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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제 Jun 22. 2024

돌아갈 장소

사람은 언제, 어떤 식으로 그런 장소를 발견하는 걸까

사람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그래서 이토록 중요한 걸지도 모른다.

정처 없이 떠도는 일도 좋지만 결국 나를 받아줄 사람과 장소가 없고, 그저 무궁무진한 안개 속 길 한가운데 던져져 있다면 유랑에서 오는 행복은 그저 사치일지도 모른다.


2014년 7월 일본 히로시마현 오노미치에서 혼자 여행하면서 썼던 문장이다. 당시의 나는 자유와 안정의 역설에 대해 한창 고민하다 위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유랑하는 일도 좋지만 어느샌가 나는 돌아갈 곳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갈 장소'라는 것이 무엇인지, 언제 그러한 것이 생기는 건지 몰랐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서울 집에 대해서도, 유학시절 내 '공간'이라는 걸 처음 갖게 됐을 때도 그곳이 내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곳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돌아갈 장소. 사람은 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그런 장소를 발견하는 것일까.


에쿠니 가오리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나온 구절처럼 나는 돌아갈 장소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회사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고민을 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 대해서는 아주 가끔씩만 떠올리면서 사는 요즘. 오래간만에 전혜린의 책을 읽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종종 이렇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 아주 오랜만이라도 그곳에 다다르면 잊고 있던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는 느낌.


그러고 보니 나, '돌아갈 곳'을 그토록 찾고 있지 않았나.


삶의 리얼리티에 던져져 있는 와중에 고난과 우울은 끊임없이 찾아온다. 힘든 회사생활, 복잡한 인간관계, 타인과의 비교, 오해와 무례한 말들, 경제적 고민,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맘대로 되지 않는 자녀계획, 예측할 수 없는 일정,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이 나를 덮쳐온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에게는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 내가 좋아했던 시절 속 문장들이 있다는 안도감. 



어떤 날 나는 백조가 마지막으로 떠 있는 것을 저녁 늦도록 지켜본 일이 있다. 어둑어둑한 박명 속에 흰 덩어리가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때때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몹시 외로워보였다.
나 자신의 심경 그대로였는지 모른다.

(중략)

지금도 나는 뮌헨의 가을하면 내가 처음 도착한 해의 가을이 생각나고 그때의 심연 속을 헤매던 느낌과 모든 것이 회색이던 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 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나고 그리운 것은 웬일일까? 뮌헨이 그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내가 뮌헨에 대해 신선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구라파적 가스등과 함께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는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십여 년 만에 이 문장을 다시 읽고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움 같은 게 올라온다는 그 사실 자체가 좋았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 언제든 다시 찾아갈 수 있는 곳. 이것이 바로 '돌아갈 장소'가 아닐까. 어딘가로 물리적으로 돌아가는 것 혹은 도피할 곳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더 잘 디디고 설 수 있게 해주는 것들. 때로는 문장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여행지에서 만났던 광경일 수도 있고, 사진이나 영상 속 장면일 수도 있는 그것들.


이런 글귀들은 아무런 보답 없이도 나를 숨 쉬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젊었고 대체로 행복했다. 먹거나 입는 것보다는 책을 사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을 중시하고 좋아하는 우리의 근본적 공동 요소는 그대로 허용되고 유지되었다. 그 점에서는 우리는 언제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가령 수입의 반을 넘는 책 한권을 사기를 우리는 한번도 주저해 본 일이 없다.
그 대신 언제나 가난했고 가난이 우리에게는 재미있었다.



예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노을이 새빨갛게 타는 내 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광경이 아름다워서였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니면 대학교 1학년 때 아무 이유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은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완벽하게 인식에 바쳐진 순간이었다. 이런 완전한 순간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그것을 다시 소유하고 싶다. 완전한 환희나 절망, 무엇이든지 잡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에 의해서 뒤흔들려 보고 싶다. 뼈 속까지, 그런 순간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고 있다.


이런 문장을 읽고 어떻게 생을 살아내지 않을 수 없을까 싶다. 물론 전혜린 작가는 생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이른 나이에 생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가 남긴 불꽃은 여전히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격정적으로 사는 것 ⏤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 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일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을 사랑한다.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 밀매상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


이 구절에 대해서도 거의 글 한 편을 써야겠다만, 진심으로 애절하게 사랑했던 문장이다. 책을 읽고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나는 어느 날 문득 결심한 사람처럼 이 글귀를 떠올리고는 '대낮을 견디는 사랑'을 하고자 했다. 이 문장을 처음 접했던 24살의 나는 이 문장의 의미를 모르는 채로 외워버렸지만, 내 머릿속 저편에 통째로 저장된 문장이 인생의 어느 순간 정언명령처럼 떠올라 나를 수호해 주었고, 이제는 이 문장의 의미를 온전히 아는 나이가 되었다.


나에게 '돌아갈 장소'란 내 인생의 어느 시기를 지배했던 것들, 지나가버린 듯하지만 소리 없이 내 안에 남아있는 것들이다. 나를 살게 했던, 한 시절을 아름답게 했던 사유들. 어느새 잊었다고 생각할 때, 생각지 못했던 타이밍에 필요할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마땅히 그래야만 할 때 열심히 읽어둬서, 부지런히 보고 들어서, 돈이나 대책 없이도 훌쩍 혼자 떠나곤 해서, 성실히 기록해 둬서, 마침 이런 분야의 기억력은 또 탁월해서, 그리하여 나에게 돌아갈 장소가 있어서 다행이다. 우울할 때 꺼내볼 영화가 있어서, 무너지려 할 때마다 되새길 문장이 있어서,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아한 회복탄력성'을 길러둬서 진심으로 다행이다.


해야 할 일들에만 치여 살지 않은 것, 주도로가 아닌 샛길을 걷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 남들 눈을 의식하기보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본 것, 그런 시절들을 차곡차곡 간직한 것. 이 모든 것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줄줄, 10년 뒤의 나를 살게 할 줄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말이다.



이 글의 발단은, 내가 좋아하는 하미나 작가가 인스타 스토리에 다음 구절을 찍어서 올리는 바람에 시작되었다.


임신이나 하고 싶다. 모든 과제에서 도피하기 위해.
보다 가정에 뿌리 깊어지기 위해.

전혜린,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中


이 구절이 얼마나 뜬금없이 와닿던지. 임신의 '임' 자는커녕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시절에 읽은 책이어서 완전히 까먹고 있던 문장인데 말이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이렇게 한 치 앞을 모른다. 생은 역시 우습고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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