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작이 호불호가 갈린다는 의견이 있었는데,관람하였다.역시 보길 잘했다.
제 81회 베니스 영화제 최고의 상인 '황금사자상'수상작이며,미국 소설가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를 모티브로 해 제작됐다
감독 : 페르도 알모도바르 / 주연 : 틸다 스윈턴, 줄리앤 무어 / 제작 : 로드픽쳐스 / 장르 : 드라마 / 개봉 : 10월23일 /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 107분
성공한 작가인 잉그리드는 오래전 가깝게 지냈지만 10년간 연락이 끊겼던 친구 마사가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병원을 찾는다.종군기자였던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딸과의 소원한 관계등 녹록치않은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새로운 치료에 희망을 품었던 마사는 다른 곳으로 암세포가 전이됐다는 소식에 절망하지만,곧 자신이 안락사를 계획해 왔음을 잉그리드에게 털어놓는다.그리고 자신이 눈을 감는 순간,단지 '옆방'(= ' the room next door')에만 머물러 달라고 부탁한다.잉그리드는 망설이지만 마사의 부탁을 받아들이고,두 사람은 뉴욕 외곽의 고급 주택에서 한달간 지내기 시작한다.
둘의 일상은 평범하다.함께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며,책방에도 가고 선베드에 누워 햇빛도 쬔다.
하지만,마사가 언제 죽음을 선택할지 모르기에 이들의 일상엔 '죽음의 긴장'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 영화에서 유독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건 바로 '색'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컬러라면 잿빛이나 검은색이 타당할 것이지만 이 영화에선 그렇지 않다.
잉그리드가 입는 그린 코트와 보랏빛 스웨터,죽음을 앞둔 마사가 차려입은 샛노란 자켓과 빨간 립스틱,그리고 마치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는 녹색과 빨강의 선베드...알모도바르 감독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지만 침울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신 빛과 생명력이 충만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빛과 생명력 .... 그렇다.죽음과 대비돼서 그런지 욕망과 자기주장으로 가득한 '쨍한'색깔들이 유독 더 눈에 띤다.
죽으러 간 저택에서 유난히 지저귀는 새소리가 크게 들리고,햇빛은 더할나위없이 눈이 부시며 두 사람의 대화는 연인의 그것보다 다정하다. 마사가 죽음을 선택하지만,그 죽음 직전의 시간을 절망과 몰핀과 우울이 아닌,빛나고 다정하고 충만한 시간들로 채움으로서,죽음자체를 존엄하게 만드는 것이다.역설적이지만 마사는 죽음을 통해 삶을 긍정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안락사를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영화다.(알모도바르 감독은 이번 베니스 영화제에서 “전 세계적으로 안락사가 가능해야 한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마사는 치료를 포기하면서 말한다."난 잘 죽을 권리가 있어.존엄을 지키며 퇴장할래. "
그 때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데 선홍빛 눈이다.죽음을 '선택'하는 순간,내리는 핑크빛 눈.'핑크'는 사실 사랑의 색 아니던가. 베니스 영화제 시사회 때 감독은 꽃분홍 정장을 입고 나왔는데,그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자 그의 시그니처 색이라니,여기서 내리는 눈이 핑크빛인 건 '축복'이란 의미인거다.
마사에겐 축복이 더 있다.'옆방'에서 자신의 죽음을 목격할 친구가 있으니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라면 그런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을까?라는 자문을 했는데,난 그럴수 없을 것 같았다.(개인적으로는 안락사에 찬성하지 않는데다가 감정형 인간이라 견뎌낼 재간이 없을 것 같아서다.)
잉그리드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영화 속에선 잉그리드와 마사가 기자생활을 하는동안 친했지만 10년동안 연락이 끊긴 것으로 나온다. 아마 10년이라는 시간의 거리가 있었기에,잉그리드가 조금은 객관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마사의 마지막 선택을 지켜보고 응원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정말 자주보고 가까운 사이라면,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매일매일 울고불며 마사와의 남은 날들을 보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인터뷰에서 말했듯,알모도바르 감독은 잉그리드를 통해 '아무 말 없이 상대를 지지하는 인간적인 이해심으로 곁에 있어주는 것'이 타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영화는 현재 75세인 알마도바르 감독이 최근들어 죽음이라든지,기후재앙같은 환경문제,지구의 총체적 위기 에 관심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잉그리드와 마사의 과거 연인이었던 남자(존 터투로)의 입을 빌어 '지구는 희망이 없다'고 역설하면서도 잉그리드의 입을 빌어서는 "희망이 없는게 아니다.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라고 반박하기도한다.
기존의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들이 동성애적인 애정관계,기괴하면서도 충격적인 내용의 작품들이 많았기에 이 작품은 감독의 영화가 맞나?싶을 정도로 잔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그리고 감독의 메시지가 배우들의 대사로 다소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부분도 많아 고개를 갸우뚱하게도 한다.
하지만,' 죽음','안락사'라는 소재를 철학적으로 사유하게 하는 품위있는 연출과, 역시 기대이상으로 황홀한 연기를 보여주는 틸다 스윈튼과 줄리앤 무어의 연기 신공을 보노라면,몇가지 아쉬움은 크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 단편영화 <휴먼 보이스>(2020)로 한 차례 틸다 스윈턴과 작업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룸 넥스트 도어>의 시나리오를 스윈턴에게 이메일로 보내며 “내가 생각해둔 배우가 있긴 하지만 다 읽은 후 누가 잉그리드를 연기하면 좋을지 회신해주세요”라고 적었다고 한다. 스윈턴은 읽자마자 단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고, 그 이름이 알모도바르가 염두에 둔 배우와 다를까 초조했다. 스윈턴이 답을 적은 메일의 전송 버튼을 누른 동시에 알모도바르로부터 추가 메일 한통이 도착했다. 두 메일엔 똑같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내가 생각한 이름은 줄리앤 무어입니다.” (-씨네21 발췌) *
이 글을 읽고 멋진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 만큼 근사한 일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11월 4일 현재 관객수가 2.2만명 밖에 되지 않는다.어떤 면에서 놀라운(?) 숫자다.
내 지인은 '민낯 클로즈업의 역대급작품'이라고 했는데,야위고 창백한 얼굴에 붉은 립스틱을 칠한 틸다 스윈튼의 아름다운 맨얼굴을 꼭 극장에서 확인하시길 바란다.
내 맘대로 랭크 :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