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1일 오전.
길고도 독했던 진통 끝에 작고 여린 아기가 태어났다.
심박수는 불규칙했고 머리는 골반에 껴 꿈쩍하지 못 한 채 하늘을 보고 누운 아기를 끝내 자연분만으로 낳자던 남편을 원망하며 마지막 힘을 주던 순간 태변을 온몸에 바른 녀석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얼핏 보이는 아기의 혈색은 아주 아주 새하얗다 못 해 파란색을 띄고 있었다.
잠시 내 배 위에 올려진 그 녀석은 끝내 울지 못하고 간호사의 품에 안겨 급히 분만실을 빠져 나가버렸다.
물커덩.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배 위에 놓였던 뜨거운, 그 묘한 느낌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무튼 이제 됐다.
이제 끝났다.
아. . 입덧도 그리 힘들더니 진통도 장난이 아니네.
아기에 대한 걱정보단 힘들었던 내 자신을 추스르며 면회 온 가족들과 생생한 출산 담을 나누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간호사의 품에 안긴 아기가 병실로 들어왔다.
젖 한 번 물려주세요.
예? 아. . 예. . 예. .
어정쩡한 자세로 아기를 가슴 위에 올려놓고 어찌할 바를 몰라 목석처럼 누워있었다.
그렇게 그 잠시의 시간, 지금 생각해 보면 고작 1분도 안 된 시간이었던 짧은 순간만에 간호사가 안되겠다며 다시 아기를 안고 나가버렸다.
요즘 유행하는 르봐이예 분만이니. 캥거루 케어니 하는 그럴싸한 출산의 로망은 '호흡기내과로 옮겨졌던 아기가 울긴 울었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다행히 아기는 병원 신생아실에서 3일을 무사히 지냈다.
오히려 그 사이 응급실을 다녀온 건 아기가 아닌 나였다.
가슴에 알 수 없는 멍울이 져 통증이 지속되면서 난 내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그렇게 내 몸을 돌보며 병원을 다니는 동안 아기는 홀로 신생아실에 누워있어야 했다.
조리원으로 옮겨진 후에야 우리는 뜨거운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아기가 내 아이구나..
아기는 세상에 나오기가 그토록 버거웠는지 내 가슴에서 쌔근쌔근 잘도 잤다.
조리원 신생아실 선생님들이 우리 아기를 칭찬했다.
어쩜 신생아 피부가 이렇게 하얗지?
엄마 닮아 그런가?
내심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유빛깔의 내 아기. .
그렇게 나흘을 보낸 그 날, 아침 일찍 병원을 다녀온 후 이제 막 아기를 안아보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산모님, 아침에 소아과 선생님이 다녀가셨는데 상담 좀 하자고 하셔요.
아기 데리고 나오세요.
영문도 모른 채 나는 또 아기를 간호사에게 빼앗기듯 넘겨주고 남편과 함께 소아과 의사를 만나러 갔다.
아기가 빈혈 수치가 너무 낮네요.
아....예.
이렇게 낮을 수가 없는데요.
아...예...그럼 어떡하나요?
대학 병원으로 가셔야죠. 신생아 자리 있는 병원이 있는지 지금 알아보고 있으니 빨리 준비하세요.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의사가 그 말을 하는 그 순간 느긋하게 돌아가던 모든 장면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느긋하게 움직이던 모두가 마치 빨리감기라도 하는 것 마냥 급하게 움직였다.
우리 아기는 좀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아무 문제가 없는데 갑자기 문제가 되어버린 이상한 순간이었다.
앰뷸런스가 다급하게 준비되고 간호사들은 얼른 보호자분 나오라며 채근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데 산모는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며 조리원 직원들이 나를 말렸다.
내가 엄마인데, 엄마는 안 가는 게 더 나을 거란다.
결국 난 조리원에 덩그러니 남겨지고 마침 면회를 오신 친정아빠가 남편과 구급차에 올랐다.
한 발 늦게 친정엄마가 조카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왔다.
상황을 전해 들은 엄마는 아빠께 전화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기 다시 데려오라고.
큰 병원 가면 필요 없는 검사 다 받고 아기 잡는 짓이라고.
아기는 엄마 모유 먹고 엄마 품에 있으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다며 절대 입원시키지 말고 그대로 데려오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 달리 아기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병원의 설득 끝에 남편과 아빤 아기를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입원시켰다.
면회는 하루 두 번.
30분씩.
부모만 가능합니다.
초겨울인데 태풍 같은 모진 바람과 함께 비가 쏟아졌다.
그 날 저녁 그렇게 분위기 조성까지 해주는 날씨 덕에 눈물을 쏟으며 아기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도 정신이 없으셨는지 뻔이 아는 길을 헤매셨다.
면회시간 1분 전, 주차장 입구를 찾지 못 해 결국 나는 비를 맞으며 병원으로 뛰었다.
아직 붓기가 빠지지 않아 발가락만 겨우 걸친 슬리퍼로 물이 새어 들어왔고 어깨엔 바람이 드는지 콕콕 쑤시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면회시간에 맞춰 도착한 것이 다행일 뿐 아무 생각도 없었다.
짧지만 길게 늘어선 줄.
신분증 검사.
앞치마와 마스크 착용.
소독.
그리고 인큐베이터 안의 내 작은 아기...
아기의 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부착된 각종 장치들.
작디 작은 입 안으로 연결된 호스.
여기 저기 꽂아둔 주삿바늘.
테이프로 고정시킨 쪽쪽이를 입에 문 채 우리 아기는 안대와 기저귀만 차고 뉘어져 있었다.
얼마나 지쳤는지 축 처진 아기는 겨우 숨만 몰아쉬며 엄마 목소리를 듣긴 하는지 잠만 자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내 인생 그토록 가슴 찢어지는 고통은 없었으리라.
눈물이 앞을 가려 아기가 흐릿하게 보였다.
1분 보다 짧았던 30분 동안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가 엄마 왔어.
우리 아기 많이 무서웠지?
엄마 또 올 거야. 걱정마.
고작 이 소용없는 몇 마디의 말과 허공을 사이에 두고 뽀뽀해주는 것. 오직 그것 뿐 손을 잡아 줄 수도 안아 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짧은 면회를 뒤로 하고 아기를 홀로 낯선 곳에 남겨두고 나오며 하염없이 울었다.
먹이지도 못할 젖이 돌아 아팠다.
돌덩이 같은 가슴이 아팠고,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한 가슴이 아팠다.
아기의 첫 날은 금식이란다.
금식이 끝나면 젖을 유축해 먹일 수 있다고 한다.
아직 아기가 빨아보지도 못 한 젖을 기계로 짜내기 시작했다.
유축기를 밤새 돌려도 겨우 10미리 남짓. 우리 아기 한 끼 식사의 6분의 1도 못 미치는 양이었다.
하지만 그 초유 조차 너무 소중했기에 한 팩 한 팩 정성껏 냉동해 병원으로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냈다.
병원까지 왕복 2시간, 30분간의 면회. 하루 두 번.
조리원으로 돌아오면 이미 식사시간이 훌쩍 지나버린지라 방으로 들어와 있는, 다 식어버린 밥을 꾸역꾸역 씹어 삼켜야 했다.
젖양을 늘리기 위해선 많이 먹는 방법 밖엔 없다 했다.
그렇게 넘어가지도 않는 그 음식들을 억지로 삼키고 또 삼켰다.
밤이 되면 온 몸이 퉁퉁 부어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열이 펄펄 끓는데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아프면 어떡하지?
우리 아기가 기다릴 텐데.
아무도 찾아가지 않으면 우리 아기 얼마나 외롭고 무서울까.
절대 내가 쓰러지면 안돼.
그렇게 그 시간들을 버텼다.
그 사이 아기는 수혈을 받았다.
창백했던, 너무 창백해 투명하기까지 했던 아가의 발바닥에 발갛게 핏기가 돌았다.
아기의 적혈구가 깨지는 원인을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수혈 후 위험하지 않을 만큼 수치가 올랐지만 여전히 오르락 내리락이다.
그렇게 아기는 퇴원을 하고 내 품으로 돌아왔다.
짧지만 길었던.
너무 힘들었지만 쓰러질 권한 조차 없었던 일주일을 보냈다.
그 일주일 동안 나는 엄마가 되었고,
그 일주일 동안 나는 30년간 깨닫지 못한 우리 엄마를 알게 되었다.
유별나게 자식 건강에 맘 졸이던 우리 엄마.
몸에 조금이라도 해로운 것은 일절 금지시켜 버리던 엄마.
다 큰 성인이 되도록 끝없는 스킨십으로 자식의 정서를 어루 만지시던,
그렇게 오직 자식 밖에 모르고 평생을 살아온 우리 엄마.
우리 아기 입원하던 날 그토록 아기를 다시 데리고 오라고 하셨던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30년 전, 이미 똑같은 일을 겪었던 엄마이기에.
30년 동안 딸의 건강에 전전긍긍하며 살아 온 엄마이기에 엄마는 나와 우리 아기가 겪을 고통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갓 태어난 내가 이마에 바늘을 꽂고 인큐베이터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렇게 울었다던 엄마의 얘기를 무심히 흘려들었었는데..
불과 며칠 전, 출산 후유증으로 응급실에 있는 날 찾아와 손을 쓸어만지며 눈물을 삼키던 엄마가 떠올랐다.
난 이제 우리 아기에겐 엄마이나 여전히 우리 엄마에겐 여린 자식일 뿐이었다.
또, 행여 딸처럼 유년기를 분리불안으로 고생할까 봐 손자를 걱정하는 우리 엄마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아무도 내가 퉁퉁 부은 발에 여름 슬리퍼를 끼워신고 다닌다고 신경 쓰지 않았지만, 우리 엄만 그런 내 발에 꼭 맞는 사이즈의 털 신발을 말없이 사 보내셨다.
추운 날씨에 면회 다니느라 몸조리도 못 하면서 맞지도 않는 여름 슬리퍼가 웬 말이냐며...
아직도 우리 아기는 자다가도 이유 없이 서럽게 울 때가 있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그럴 때마다 아기를 가장 따뜻한 마음으로 끌어안아 달랜다.
우리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평온을 되찾고 다시금 꿈속으로 빠져드는, 여전히 새하얀 아들을 바라보며 31년간 자식의 건강과 심적 안정에 극성이셨던 엄마를 만난다.
그렇게 나도 우리 엄마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