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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훈 May 16. 2022

비즈니스냐? 이코노미냐? 고민하는 당신에게


 해외여행자라면 누구나 비즈니스 클래스를 선호합니다. 여행 예산이 충분하거나, 넘치는 마일리지를 보유한 경우라면 당연히 프리미엄 클래스를 선택하겠죠. 다만 무한한 여행자의 욕망에 반해 초라한 잔고의 유한함은 늘 우리를 고민하게 합니다. 비즈니스 클래스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무리를 한다면야 탑승 못할 이유는 없겠죠. 다만 최근 다수의 충치 치료를 받았을 수도 있고(무려 금으로!), 접촉사고가 났음에도 향후의 중고 판매를 생각해 보험처리 없이 현금으로 해결했을 수도 있죠. 하필 내 결혼식에 축의금을 많이 한 절친한 친구의 결혼이 곧 예정되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불가피한 고민을 하고 있는 여러분의 선택을 도와줄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탑승하려는 노선의 기종이나 기재, 서비스 종류, 운항 시간, 지상 서비스 같은 기술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디스크 환자라면 비즈니스! 단거리는 이코노미! 같은 뻔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론적 근거는 없지만, 심정적으로 어쩐지 그럴듯한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여행자라면 이코노미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첫 번째로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있는 여행자입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하는 여행자에게 대한항공의 프레스티지 스위트는 필요 이상으로 넓어 보입니다. 구도의 길을 걷고자 티벳 라싸로 향하는 트레커에게 필요한 것은 비즈니스 클래스의 샴페인 서비스가 아니라 틱낫한이나 법륜 스님의 책 한 권입니다. 이런 경우들이라면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부터 오체투지의 자세로 불편함을 이겨내야 합니다. 경건함을 유지하고 목표를 떠올립니다. 다만, 목적을 훌륭히 달성한 당신은 편안함을 누릴 자격을 득했습니다. 그렇기에 복편에서 호화로움을 허용하는 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카운터에서 유상 업그레이드를 시도하거나, 비딩에 참여해보세요. 아니면 애초에 목표달성을 염두에 두고 왕편과 복편의 클래스를 다르게 예약할 수도 있습니다. 버벌진트의 <충분히 예뻐>를 들으며 승무원이 건네는 뜨거운 타월을 받아 들면 마음이 한결 더 편안해질 거에요.


<정상으로 가는 길 - Mt. Kilimanjaro>


 두 번째로는 술 때문에 비즈니스 클래스를 고집하는 애주가 여행자입니다. 진정으로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라면 이코노미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타이항공은 진과 토닉워터를 시키면 라임 슬라이스를 머들러와 함께 제공합니다. 상냥한 미소를 곁들여서요. 싱가포르항공에선 래플스 호텔의 대표 칵테일인 싱가폴 슬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메뉴에 버번이 있으면 버번콕을, 바카디가 있으면 럼콕을 스스로 제조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입니다. 조주를 위한 콜라는 갤리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식사와 함께 와인을 즐기고, 착륙 전 맥주로 입가심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진정한 애주가라면 당신 앞에 놓여진 모든 술을 사랑할 줄 알아야겠죠. 그리고 사실 퍼스트가 아니라면야, 비즈니스의 주류들도 퍽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SINGHA와 함께라면 이곳은 이미 태국입니다 - TG659>


 다만 이코노미 클래스는 음주에 조금 엄격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국적기는 승객이 취했는지 여부에 더욱 민감합니다. 그래서 ‘나는 진상이 아닌 한 명의 애주가에 불과하다’라는 인상을 심고, '난동을 부리지 않을거에요'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식 자리에서의 억지 폭탄주나 술자리 게임의 벌칙주를 마시는 것처럼 들이켜서는 안됩니다. 독서등을 켜 놓고 맛을 음미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승무원이 지나갈 때면 술잔을 바라보고 ‘음~’하는 감탄사를 곁들이는 거지요. 실제로 제가 아프리카를 여행했을 때 에미레이츠 항공의 한 승무원이 한껏 드러낸 제 애주가적 행동에 감탄한 나머지, 기념품이라며 프리미엄 클래스의 주류 미니어처들을 십 수병 챙겨주었습니다. 초원 속 롯지에서 꺼내 마시라면서요. 전 그 자리에서 감격해서(혹은 취해서) 눈물을 쏟았답니다. 다만 사우디아 항공이나 에어 아라비아와 같이 주류를 제공하지 않는 항공사를 이용하는 경우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 항공사들밖에 이용할 수 없다면 애주가 분들은 클래스를 떠나 여행 자체를 다시 고민해야 하겠죠.


 마지막은 3인 이상의 친구들과 함께 우정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여행자입니다. 최신의 스위트형 비즈니스 좌석들은 물론이고, 스태거드나 헤링본 형식의 좌석들은 2인 이상의 동행들이 소통할 수 있는 여지를 물리적으로 차단합니다. 아이를 둘 이상 가진 부모들이 매우 바빠지는 경우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모름지기 친구들과의 여행이라면, 3-4-3 배열의 한가운데 넷이 죽 늘어앉아 서로의 기내식도 뺐어 먹고, 소곤소곤 수다도 떨고, 침 흘리며 잠이 든 모습을 몰래 찍어 보관하며 추억을 만드는 편이 더 즐겁지 않을까요? 물론 전용 바 공간을 보유한 에미레이츠 항공의 일부 기종이나, 넷이서 화투도 칠 수 있을법한 카타르항공의 Q-Suite은 흔치 않은 예외이겠지만, 친구들과 함께라면 어떤 이코노미 좌석에서도 불편함을 잊고 신나는 비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리가 아프면 같이 스트레칭을 하고, 안마를 해주며 여행했던 예전의 날들이 그리워지네요.


<퍼스트가 아닙니다. 비즈니스 입니다 - Q-Suite, Qatar Airways>




 여행이란 가방을 싸고, 리무진 버스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태국을 처음 방문하던 때, 그 유명한 TG659편에서 저는 태국을 만났습니다. 타이항공의 화려한 보랏빛 장식들과 (그들이 이야기하는) '실크' 같은 부드러운 서비스를 만난 거죠. 저에게 그곳은 이미 카오산 로드였고 왕궁이였고, 덕분에 저는 태국에 더 빨리 더 오래 취해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코노미건 비즈니스건, 혹은 퍼스트이건 사실 크게 중요하진 않습니다. 여행이 시작된 순간부터, 내가 보고 접하는 모든 순간을 하나의 ‘이야기’로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여행자 개인이 할 일이 아닐까요?


 비즈니스를 이용하는 것이 단순히 남에게 자랑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이코노미를 선택한 것도 내가 돈이 없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내 기분과 상황에 맞게 써내는 특별한 일상의 작은 서사 한 조각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했을 때, 기대를 한껏 모아 발권한 비즈니스 좌석이 우등고속으로 변경되더라도, 좁은 이코노미석의 앞자리 아저씨가 좌석을 한껏 뒤로 젖힌다 하더라도, 나는 비프를 먹고 싶었는데 내 앞에서 끊겨 피쉬를 받아야 하더라도 매 순간 웃으며 의연해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젠 이런 불편함들도 그저 작은 에피소드로 기록하고 즐거운 여행을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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