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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Jul 31. 2024

그 시대의 기사도

모르그 거리에 혼자 서있다가 …

그렇지, 그 시절은 이제 퇴색해 버렸어. 하지만 나의 젊음은 영원히 그 시절 그 시대에 묻혀있는 것이지. 생각하면, 안타까운 기분이야. 뭔가 잃어버린 느낌이 잔뜩 들기도 해. 사실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고감도의 유행과 모든 화려한 첨단 기술이 매일 우리 시선을 끌지. 하지만, 난 이따금 그 시절을 생각하곤 해. 왜 그런 거 있잖아, 오래된 서재 구석이나 책갈피에서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되찾게 될 때, 그리고 그 사진 속에서, 옛날 친구나 내가 좋아한 소녀의 활짝 웃는 얼굴, 혹은 근사한 표정으로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는 내 모습, 그런 걸 다시 보게 되는 순간, 그런 순간에는 말이야. 뭐라 해야 할까, 그래, 오히려 그 시절이 지금보다 더 찬란했다는 그런 느낌말이야. 

     

아마, 그래서 내가 이자크 디네센의 낭만과 고딕 분위기가 넘치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몰라.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요즘 다시 읽어도 좋아. 예를 들어 단편 「그 시대의 기사도」는, 언제나 내 마음을 흔드는 게 있어. 어느 비 내리는 밤 우연히 만난 꿈의 여인과 하룻밤 정사를 그토록 낭만적인 환상과 우수 어린 비애로 그린 작품은 처음 봤어. 다시 읽어도 그래. 이상한 일이지. 여자들은 싫어할 이야기일지도 몰라. 여자가 쓴 작품이지만. 이자크, 19세기 말에 태어난 그 작가가 한창 자신의 고단한 삶을 살던 시절은 20세기 초반이야. 그러니, 나와는 먼 세대인데 말이지. 할머니나 다름없지. 그런데 왜 끌리는 걸까? 잘 모르겠다. 응? 아 맞아. 아주 먼 세대는 아니지.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그 세대 작가나 감독이 만든 로맨틱한 작품이 세상을 지배했으니까.      


요즘은 그저 책 읽는 것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느낌이야. 새로운 것도 읽어야 하지만 그동안 살며 좋아한 작품을 전부 다시 읽어 보기로 했어. 제인 에어, 모비 딕, 피의 수확, 스완네 집 쪽으로, 보트 위의 세 남자… 그런 작품들을 차례로 다시 읽기로 마음먹었어.     


그런데, 어제는, 에드거 앨런 포를 읽고 있었어. 「모르그 거리의 살인 사건」이란 작품이야. 그걸 읽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는 거야. 나는 고개를 들어 뒤돌아보았지. 그런데, 거기, 바로 그 여자가 서 있더라. 그래, 그 여자… 젊은 시절에 만났던, 죽음의 무도를 좋아했고 내게 왈츠도 알려준 여자, 안나 카레니나의 무도회 장면 알지? 그 왈츠가 나오는 무도회 장면을 읽으며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하던 여자야. 그녀와 함께 나란히 누워 포의 작품을 읽은 적도 있었어. 그게 바로 모르그 거리의 살인 사건이지. 그걸 읽다가 그녀는 갑자기 내게 탐정이 되라고 했어. 탐정이 되지 않으면 나랑 헤어지겠다고 선언하곤 막 웃었지.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눈빛과 입술은 뭐라고 해야 할까, 장난기도 있고, 신비하고 고요한 매력을 지녔지. 그 여자가 등 뒤에 서 있는 거야. 난 당황했어. 어, 어떻게 여, 여기에, 하고 말을 더듬었어. 그녀에게 품었던 감정이 고스란히 다시 밀려오는 것 있지.     


그 시절에는 나는 교회에 다녔어. 지금은 안 다녀. 우리는 교회에서 만났지. 그 여자 집안은 좋았어. 아버지가 교회 집사였는데, 나랏일을 하는 고위 관료였지. 대대로 좋은 집안이었다고 해. 먼 조상 가운데는 구미호를 사냥하다가 사랑에 빠진 유명한 무관도 한 분 계신다고 했어. 어쨌든 나는 결국 탐정이 되지 못했고,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그 여자는 나를 떠났지. 그런데 그토록 비현실적인 순간에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거야. 이해할 수 없었지. 왜 다시 온 걸까?      


그 여자가 내게 Long Time No See 키스를 하더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어. 이제는 탐정이 되지 말고 탐정소설을 쓰라는 거야. 그 시대가 아닌 우리 시대의 기사도 이야기를 꼭 쓰라는 거야. 난 고개를 갸웃했어. 그런 신파 같은 걸… 신파이긴 해도 내가 그런 걸 쓸 수 있을까? 여자가, 여전히 눈빛과 입술이 아름다운 그 여자가, 조용히 웃으며 속삭였어.     


안녕, 소설 다 쓰면 다시 올게.      


그러곤 가버린 거야.      


가버린 거지.     


가버렸어…     


나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 모르그 거리에서 혼자 서있다가      


잠시 뒤에 터벅터벅 거실을 걸어 현실로 돌아왔지.      


낡은 흑백 사진을 잠깐 들여다본 기분이랄까,      


아무튼 뭐…… 



1년 전에『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 에 수록된 <그 시대의 기사도>를 다시 읽고선 그만 분위기에 휩쓸려서 썼던 글이다. 작가 이자크 디네센 Isak Dinesen (1885~1962)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 『바베트의 만찬』으로 유명하다. 



우아하고 낭만적이다. 밤의 신비와 꿈 같은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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