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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Aug 09. 2024

피가 흥건한 나의 문학적 영웅주의

버지니아 울프와 대실 해밋은 어울리지 않지만 

존경하는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에세이가 더 좋다. 다음은 『울프 일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내 영웅주의는 순수하게 문학적인 것이어서, 나는 [댈러웨이 부인]을 고쳐 쓰는 일이 고작이다. 교정은 글을 쓴다는 일 가운데서 가장 오싹한 부분이며, 가장 우울하고, 가장 힘겨운 부분이다. 가장 좋지 않은 곳은 (늘 그렇듯이) 첫 부분으로, 비행기가 여러 쪽에 걸쳐 독무대를 차지하다가 사라지고 만다. 
  
요즘 나는 프루스트에 빠져 있는데, 프루스트의 특징은 극도의 감수성과 극도의 끈기가 한데 엮여 있다는 점이다. 프루스트는 변덕스러운 색조의 마지막 한 점까지 추구한다. 프루스트는 고양이 힘줄만큼 질기고, 나비 날개의 가루만큼이나 덧없다. 프루스트는 나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며, 동시에 나로 하여금 내 문장 하나하나에 화를 내게 만들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울프 일기』중에서      


『울프 일기』 우울하고 솔직하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의 영웅적인 행동이 고작 작품을 고쳐 쓰는 일이라고 표현한 게 재미있다. 교정 보는 영웅이라니. 그렇다. 감동적이다. 책상 앞에 앉아 일기나 독후 감상을 적는 것도 어찌 보면 영웅적인 행동이며, 거창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그런 행위를 통해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고개를 끄덕이다 갸웃한다. 뭐, 버지니아 울프니까 통하는 말일지도. 

    

생각해 보니 내게도 문학적 영웅주의가 있다. 내 경우는 교정이 아니라 읽기이다. 젊은 시절에 더실 해밋의 『피의 수확』을 읽고 크게 매료되었다. 그 뒤로 해밋의 거의 모든 작품을 찾아 읽었다. 그 당시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은 남의 대학도서관을 찾아가서 지하에 보관된 낡은 책을 사서에게 신청하여 받아 읽기도 했다. 종이는 완전히 누렇고 세로쓰기였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행갈이를 하는 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일제 강점기 아니면 해방 직후에 출간된 것 같았다. 제목은 『그림자 없는 사내』였고 한글 표기법이 옛날식이어서 낯설었는데 음독하면 무슨 뜻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탐정 샘 스페이드가 등장하는 『말타의 매』도 좋았지만 역시 가장 좋아한 작품은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피의 수확』이었다. 배짱과 육탄으로 거친 세력들과 비정하게 맞서는 이름 없는 탐정 ‘콘티넨털 옵’(대기업인 콘티넨털 탐정사의 직원이라는 뜻)은 내게 헤라클레스를 초월하는 강철같은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나는 마르고 허약한 몸매에 남성미가 부족했기에, 일종의 보상 심리로 마초 분위기의 이 소설을 사랑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해밋의 <피의 수확> 영문판의 매력적으로 선정적인 표지 ㅎ

1929년에 세상에 나온 『피의 수확』은 훗날 일본 의 유명한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요짐보>에 (무단) 차용되고, 다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로 변신하여 당시 침체되었던 세계 영화계에 불을 질렀다. 1996년에는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라스트 맨 스탠딩>으로 새롭게 등장하기도 했다.       


이들 작품은 모두 동일한 뼈대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이름 없는 사내가 한 마을에 흘러 들어온다. 마을에는 서로 대립하는 무법의 갱단 세력이 있고 치안을 맡은 경찰 역시 부패한 세력의 하나에 불과하다. 주인공 콘티넨탈 옵은 이들 사이에서 터프한 행동으로 위험에 맞서며, 절묘하게 거래하고, 이간질하고, 뒤통수를 치고, 서로 싸우게 만들어 결국 모두 일망타진한다는 스토리이다. 냉정한 지략으로 움직이는 활극인 원작 소설에 비해 세 편의 영화에서는 폭력 장면을 극대화하여 피가 난무하는 장면을 많이 선사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앙드레 지드는 이 원작 소설에 홀딱 반해 “잔혹한 시니시즘과 공포에 있어 완벽하다”라고 격찬했다.      


암흑가를 육탄으로 돌진하는 더실 해밋 스타일의 이러한 행동주의 탐정 소설은 기존의 퍼즐 풀이식 안락의자형 추리소설과는 전혀 다른 하드보일드 시대를 처음으로 열면서 미스터리 소설사의 흐름을 영원히 바꿨다고 평가된다. 

     



요즘의 내 영웅주의는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 것이라고 할까. 물론, 내 경우 교정은 고사하고 플롯 하나 없으며 중구난방으로 쓴다. 게다가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먹고살자고 지겨운 코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데이터를 마주하고, 처리 과정을 모색하고, 코딩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오류 메시지를 살핀다. 저녁 무렵에는 수정한 코딩에 주석을 달고 분석 결과를 보고서로 만들기 위해 고심한다. 


이런 작업에 몰입하다 보면, 문득, 느닷없이, 갑작스레, 홀연히, 조건문과 반복문의 기호가 몰아치는 코딩의 광야에서, 비정한 메시지 하나가 번득 머릿속으로 날아든다. 먹고사는 문제로 매일 고민하는 일이나 (예를 들면 이따위 코딩이나), 글쓰기에서 문단을 구성하고 문장을 다듬는 일이나 근본적으로는 모두 같은 성격이 아닌가. 메시지는 이 점을 지적한다. 이봐, 익숙한 업무나 글쓰기나 그 작업 과정은 똑같아! 들여다보고 오류투성이를 먼저 만든 뒤에 수정하는 게 전부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익숙하고 안전한 일만 하다가 세월 다 가지. 음, 맞아. 고개만 끄덕. 

    

나도 버지니아 울프처럼 한때 프루스트에 빠져 지낸 적이 있다. 다시 프루스트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기도 한다. 프루스트 작품의 새 번역판이 있다는 것도 안다. 서점에서 몇 번 보았으니까. 굳이 새 번역판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요즘, 문득, 홀연히, 느닷없이, 갑작스레, 새 번역판으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돈 벌 궁리는 안 하고 자꾸 돈 쓸 생각만 한다고 아내에게 혼날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새 번역판을 살 이유가 딱히 없다. 하지만 프루스트에게 돌아갈 기회를 노린다면, 뭔가 명분이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을 설득할 명분. 새 번역판이니 새로운 마음으로 어서 읽어 보자! 뭐 그럴듯한 명분 아닌가. 오래전 어느 글쓰기 모임에서 대학을 막 졸업한 젊은 여자애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부작(국내 번역 11권)을 대학 시절에 4번 통독했다고 하여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걸 다 읽고 책을 덮고 얼굴을 들면 감동의 홍조가 가득 밀려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당근, 그러니 4번이나 읽었다고. 나는 뭐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주제에, 세월만 속절없이 보내는 신세여.

      

새 번역이 항상 나은 건 아니다. 대실 해밋의 탐정 소설들은 새 번역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과거 동서 추리 문고판의 번역이 원작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다고, 나는 믿는다. 예전 동서 추리 문고판은 번역 실력이 뛰어난 일본에서 번역한 것을 국내 출판사가 다시 번역한 경우가 많아서 그러하다는 설도 있긴 하다. 어쩌면 그건 헛소문일 수도 있다. 젊은 시절에 내가 처음 읽었던 번역판의 분위기에 내가 너무 젖어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다시 읽기의 중요성! 다시 읽기는 정말 중요하다. 명작은 다시 읽을 때 더 깊어진다. 얼마 전, 밤낮없는 프로젝트에 힘들어 늦은 밤 홀로 지친 마음에 털썩 누웠다. 내가 기거하는 서재였다. 갑자기 책을 읽고 싶었다. 몸을 일으켜 『모비 딕』을 꺼내 들었다. 아무 쪽이나 펼쳤는데, 세상에나! 오만 원짜리 한 장이 펄럭이며 떨어지는 거였다. 예전에 술 마시고 들어와 잠들면, 아내가 내 양복 호주머니를 뒤지기도 했다. 현금이 나오면 몰수했기에 쓰러지기 전에 책갈피에 돈을 숨겨두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날 문득, 느닷없이, 갑작스레, 홀연히 그때 숨긴 그 지폐를 재발견! 무려 오만 원이다! 하하하. 그렇다. 다시 읽기는 정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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