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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다 Nov 01. 2023

할머니도 딸이었던 때가 있었음을

[그림책 에세이] 넌 누구니? - 글/ 노혜진, 그림/ 노혜영

엄마는 처음부터 나에게 엄마였다.

할머니 역시 나에게는 할머니였다.

할머니에게 딸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던 때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책을 아이에게 읽어주며 나의 할머니가 떠올라 마음이 아팠고, 슬펐고, 감사했다.




<넌 누구니?>에는 두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언니인 노혜진 작가가 글을 쓰고, 동생인 노혜영 작가가 그림을 그려서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일생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가난이라는 힘든 역경 속에서 두 할머니는 꿋꿋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냈다.

황해도에서 태어난 친할머니 정자 씨. 한약방을 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다 일본군을 피해 억지로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게 된다. 그러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와 이별을 하고, 전쟁 후 아이들을 위해 악착같이 일하지만 병으로 남편을 잃게 된다.

외할머니 월순 씨. 남편을 잃고 홀로 다섯 아이를 키우지만 그래도 아이들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틈틈이 바느질감을 받아 부지런히 일해 아이를 모두 키워 출가시킨다.

두 할머니는 아들과 딸의 결혼으로 가족이 되었고, 첫 손주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두 번째 만남을 갖는다.

두 할머니는 "넌 누구니?"라는 질문에 이제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린 이 땅의 딸이었고, 여자였고, 아내였고, 엄마였고, 할머니였다고. 그리고 모든 뭇별의 시작이라고.




아이들이 왕할머니라고 부르는 분은 나의 친할머니이다.

오랜 병환으로 할아버지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나셨고, 할머니는 혼자 살고 계신다.

올해로 88세인 할머니, 이제는 얼굴에도 손에도 주름이 가득하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50도 안된 젊은 나이였다.

지금의 내 나이를 생각하면 할머니는  이른 나이에 할머니가 되신 거다.

그럼에도 나는 너무도 당연스럽게 "할머니~" 하고 부르며 할머니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언제나 일을 하고 계셨다.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어느 날은 논으로 할머니를 찾으러 나가고, 어느 날은 밭으로 할머니를 찾으러 갔다.

그곳에도 할머니가 안 계실 때는 비닐하우스에 가면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반갑게 웃으며 나를 맞아주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는 인자한 분이셨지만 생활력은 없는 분이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태어난 사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 것은 온전히 할머니의 몫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 나이 스물둘에 첫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나의 아버지이다. 또 아들, 그 밑으로 딸 둘. 그렇게 딸린 식구가 넷이 늘었다.

형편이 좋은 집으로 시집을 간 여동생과 달리 할머니의 삶은 팍팍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식들을 키우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농사를 지어 그것을 돈으로 만들어냈다.

그러한 노력으로 자식들은 장성해 각자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어 그것으로 할머니는 다 되었다 생각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결실을 맺기 위해 구부정한 허리를 갖게 되었다. 허리 한번 제대로 펼새 없이 일만 하다 보니 얻게 된 허리병은 수술로도 낫게 할 수 없었다.

어릴 때는 할머니께서 얼마큼 고되었을지, 힘드셨을지 잘 몰랐지만 나 역시 아이 둘을 낳고 키우다 보니 할머니의 억척스러운 삶이 존경스러우면서 왠지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할머니 역시 귀한 딸이었고, 사랑받으며 자랐을 텐데 여자가 되고,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사신 것은 아닐까... 하지만 결국 할머니 덕분에 아버지가 태어났고, 나 역시 소중한 두 아이를 얻은 것이라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뿐이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시댁에 가기 전 할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었다.

부모님은 할머니를 뵈러 가시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기에 전화만 드린 것이다.

언제나 명절이면 할머니댁에 가 명절 음식을 만들어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운 마음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할머니께서는 "시댁 가서 가만 앉아있지 말고, 팔 딱 걷어붙이고 일 잘하고 오니라. 뭐시든 다 잘해야 혀. 니가 큰며느리니께."하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매번 명절마다 같은 말씀을 하신다. 예전에는 이것이 잔소리처럼 느껴졌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라는 것을, 할머니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넌 누구니?>의 한 장면, 결혼 식 사진 속 두 할머니는 장성한 자식 옆에 한 그루의 나무처럼 꼿꼿하게 서 있다. 김정자 장남, 정월순 차녀라는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두 할머니의 삶이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할머니가 살아온 삶을 이렇게 글로 적다 보니 할머니의 지나온 삶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추억 속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삶을 기록할 수 있어 기쁘다.

할머니에게 지난한 세월은 결코 꽃길이 아니었을 테지만 할머니가 버텨낸 시간과 세월이 있었기에 나의 지금도 있는 것이다.

여전히 할머니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할머니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겨울이 오기 전 할머니를 뵙고 와야겠다. 그리고 할머니께 많이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겠다. 더 후회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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