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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Feb 01. 2023

한강







한강 다리 위에 걸터앉아 있는 한 수상한 여자를 지나가던 이가 구출해 냈다는 기사를 읽었다.

꽁꽁 언 손을 잡자 펑펑 눈물을 흘렸다는 그 20대 여자의 뒷모습을 상상해 봤다. 꽝꽝 얼어 다 녹지도 않은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무슨 심정이었을지.     

 

기사 아래를 보니 누가 버겁도록 눈물겹게 아름다운 청춘이 아까우니 용기 내라는 댓글을 남겼다.

그러게, 동의하는 마음으로 끄덕였다가 이내 금세 가슴에 칼바람이 꽂히는 듯 아팠다. 아름답고 찬란한 청춘이겠지만 그건 으레 남 보기에나 그런 거 아닌가. 청춘의 한복판이어도 당장 죽지 않으면 안 될 듯이 숨이 받히고 가슴이 타들어 갔을 그녀의 마음은 우리 중 누구도 다 헤아릴 수 없다. 위로도 다그침도 조심스러운 게 이럴 때다.     

어쩌면 누구라도 구해주길 바랐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당장 날카로운 얼음이 차가운 강물과 뒤섞인 저 아래로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언지 몰라 한참 무섭게 맞부딪히는 바람을 맞으며 혼란했을 수도 있다. 다시 살고 싶은 건지, 영영 잠겨 들고 싶은 건지 모르는 그 침울함과 막막함을 누가 다 헤아릴까.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해보기만 할 뿐인 나는 그 추운 날 난간 위를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었을 그녀의 빨갛게 부르튼 손등을 상상했다.     


가여웠다. 매일매일 잠들면서 내일 일어나면 꼭 죽어야지,라고 생각했던 삶의 어느 순간을 지나와보니 그 마음이 얼마나 지옥인지 알겠더라. 그 마음은 감히 선택이라 부를 수 없다.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고 남겨진 이들에게 뭐라 말을 남기고 등을 질지 고민하는 시간은 선택이 아니라 일상에 밴다. 영영 가시지 않을 꿉꿉한 눅눅함으로 곰팡이 같이 피어나고 번진다.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은 쪽을 택했겠지. 허나 그러지도 못하게 이미 잔뜩 절여진 채다. 그렇게 내몰린 사람에게 선택은 없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은 선택지가 있는 여운을 주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단어 자체가 당치 않은 짧은 이해에 불과하다.     



얼마 전 <유퀴즈온더블록>에 출연한 정신의학과 나종호 교수는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 부르는 사회 분위기를 지양해야 한다고 했다. ‘선택’이 아니라 다른 병을 앓다 죽는 것처럼, 자살이 투병의 결론일 뿐이라는 말이 하도 대단한 울림이라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감탄해 버렸다.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 에둘러 표현해도 자살이 자살인 건 변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별안간 뜬금없는 위로를 받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새겼다. 절대 결코 잘 살던 애가 왜. 걔가 그럴 애가 아닌데 대체 왜. 멀쩡하던 사람이 어쩌다가. 따위의 말은 물론 혼자만의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저 아프다가 가서 어쩌나. 더 과한 생각도 탓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 나서 김완의 <죽은 자의 집 청소>를 다시 꺼내 읽었다.

유퀴즈를 보고 나서 보니, 한강 위 그녀의 기사를 접하고 보니 책 속에 존재하는 자살이 과연 자살일까 싶었다. 대체 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등 떠밀리고 사지에 몰려야 하나. 차라리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나방의 삶이 수월하겠다며 웃던,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투병하던 친구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 애는 4년 전에 떠났다. 여전히 그 애가 다니던 여고 교문이나 같이 밥 먹은 식당을 지나치면 떠오른다. 나쁘고 모진 년. 하지만 이제 그 애는 불면과 번뇌에서 벗어났다. 그걸 바라고 원했구나. 이제 그렇게 생각해 버린다.           


사계절 중 가장 싫어하는 겨울도 중후반에 이르렀다. 오후 해가 길어졌고 어떤 날은 짧은 햇살이 무슨 봄볕처럼 따사롭다. 이게 무슨 위로가 되고 공감이 되겠냐만 어찌 됐건 모든 건 계절과 시간이 흐르듯 지나가기 마련이란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나 역시 사는 게 아니라 꾸역꾸역 버티는 시간을 먹기 싫은 밥 먹듯 욱여넣고 몇 년을 보냈다. 고백하자면 그러다 진짜 머릿속 가득 어떻게 죽어야 하나,라는 의문으로 가득해 약을 처방받아먹었다. 지금도 문득문득 아 시발 좇같은 거 이렇게 살아서 뭐가 되려고.라는 생각을 하긴 한다. 근데 지나간다. 그걸 알아서 그냥 눈 딱 감고 제발 지나가라, 지나가라. 혼잣말을 되뇐다. 지나가는 과정이 죽는 거보다 괴롭겠지만 이 순간에도 시간과 고통은 지나가고 있다. 아무리 쥐어 짜내도 버틸 힘이 더는 없을 때가 있다. 그럼 나는 그냥 해파리나 불가사리 같은 그쯤의 뭐다, 생각하고 풀어두자. 그것도 지나갈 테니까.     


물론 다 지나와도 행복만 가득한 건 아닐 거다. 삶은 원래 행복보다 고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우린 고통에 절여지고 머리채 잡혀 휘둘려보았으니 또 잘 버텨낼 수 있을 거다. 삶에 대한 의지. 당연히 그거 좀 없을 수도 있다. 없어 본 사람으로서 내가 나에 대한 믿음과 의지가 박살 나버려 바닥난 마음이 얼마나 비참한지 알고 있다. 괴롭지, 내가 나를 가장 미워해본 사람의 고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절망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래도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날 구할 구원자는 나뿐이라는 거다.

다른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거, 구차하게 부탁하는 거, 자존심 다 버리고 살려달라 도와달라 말을 꺼내는 거, 문밖을 나서는 모두 스스로 구하기 위한 구호 활동이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내가 움직여 손을 뻗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부터 살고 보자는 마음으로 어디에든 손을 뻗고 목소리를 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당신이 폐 끼치는 게 싫고 부담 주기 싫어하는 걸 안다. 하지만 도와줄 수 있어 다행이고 기쁜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 역시 잊지 않아 줬으면 한다.      


지나갈 거고 도와줄 거다.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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