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는다는 건 뭘까. 그 뜻이 외모의 어느 부분이 비슷한 게 전부가 아니란 것쯤은 안다. 유전자가 무섭다고 하는데 그걸 요즘 느낀다. 그래서 요즘 아이를 볼 때마다 생각이 많아진다. 생활 습관이, 버릇이, 매일 보는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똑 닮을 수가 있나. 아이를 키우며 그 속에서 내가 그토록 미워하던 사람을 보게 되는데 그 기분은 묘하다. 어찌할 수가 없이 타고 나는 같음을 생생히 목격하며 지난날을 떠올린다. 피는 못 속인다는데 정말 그런 것일까. 그것만큼은 내가 어쩌지 못할 것임을 알지만. 알지만. 하면서 억울해하고 또 깨닫는다.
아이는 아빠도 닮았다.
또래보다 큰 키는 아빠인 그와 엄마인 나 모두의 유전자임이 분명하다. 진한 눈썹과 쌍꺼풀 없는 눈은 나, 콧망울과 한쪽만 있는 보조개는 나, 둥근 턱도 나. 기분 좋게끔 아이의 얼굴은 나를 참 많이 닮았다. 아무래도 압도적으로 나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기에 그리 변해갔을지도 모른다. 크는 내내 아이는 내 표정을 살피고 모방하며 표정을 짓는 법을 배웠을 거다. 그러다 보면 얼굴 근육도 그에 맞게 썼을 테니 나를 닮아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아빠를 닮은 무언가도 있다. 하지만 흐린 눈이 되는지, 아니면 내 기분을 살피느라 남들이 해주는 엄마 많이 닮았단 소리만 듣는지 아이는 날 더 닮았다고 생각하며 산다.
아이는 나란히 누워 노닥댈 때마다 등을 돌리고 비비적댄다.
“엄마 등 긁어줘.”
땀띠가 기승인 여름도 아니고 건조하지 말라고 매일 샤워 후 크림을 꼼꼼히 발라 간지러울 게 없을 텐데. 아이는 등을 긁어달라고 몸을 뒤척인다. 그러면 손톱을 날처럼 세워 살금살금, 힘을 다 빼고 설렁설렁 위아래 양옆으로 움직인다. 여린 피부에 붉은 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만. 그런 다음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며 등 여기저기를 닦듯이 훑어주면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배시시 웃는다.
아이의 아빠도 그랬다. 함께 누워있을 때나 잠결에 등을 긁어달란 부탁을 자주 했다. 한때 부부였던 사람의 작은 습관을 아이를 통해 다시 보는 기분, 그 기분은 참 묘하다. 아니 어떻게 이런 걸 닮지? 아빠를 오래 관찰하고 따라 하기엔 함께 산 시간이 길지 않았다. 아이는 그저 태어날 때부터 습관이란 걸 닮아 세상에 나온 거였다. 등을 긁어주면 배시시 웃는 미소도, 흡족하게 다시 편안히 누워 휴식을 취하는 것도 죄다 아빠를 닮았고 내게 일러준다.
나만의 아이가 아니란 사실을.
이따금 그 당연한 사실을 이런 식으로 깨닫는 날이면 허무하다. 사람이 부모를 닮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도. 그렇게 미워하고 저주한 사람의 외형도 아닌 습관을 닮았다니.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하는 영역의 흔적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함에 내 존재가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낀다.
당연히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스스로 새기고 잊지 않으려 하는 사실이다.
엄마 없이 혼자 음식 주문도 못 하고 편의점도 못 가지만 언젠가 곁을 떠날 것을 잘 안다. 어떤 형태의 무어가 되든 사랑하는 내 아이는 내 곁을 떠나 훌훌 자유로워질 거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미안한 존재지만 그건 오롯이 나의 생각이고 내 마음일 뿐. 내 이 마음이 독이 되지 않고 자양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며 얼마만큼의 사랑을 쏟아야 할지 고민한다. 내 것이 아니기에 내 멋대로 사랑해서 욕심낼 수 없다는 걸 자주 생각한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 힘든 세상이 아닌 다른 차원의 어디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아이를 굳이 이 세상으로 불러낸 존재로서 늘 고심한다.
그래놓고, 아빠와 똑 닮아 잠결이나 일어나 부스스할 때 등을 긁어달라고 돌아누우면 마음이 일렁이는 거다.
초연하고 당연하게 여기며 지나칠 수 없는 촌스러움이 아이를 자유롭게 자라나지 못하게 막는 방해물이 되어선 안 될 텐데.
주말 내내 잘 자고 잘 먹다가, 다시 잠들었다 일어난 아이의 등을 슥슥 긁어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