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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May 22. 2023

어린아이






내 안의 어린아이 치료. 

여전히 어린 시절 그 안의 어딘가를 헤매며 아파하는 마음속 어딘가를 발견해 내어 치료한다는 기사였는지 인터뷰였는지 모를 걸 본 후였다. 미성숙한 내 안의 어디를 돌봐야 하고 잘 달래서 살아가자는 이야기가 도통 남의 말 같지 않았다.

그 안에 여태껏 사는 어린아이를 어째야 하긴 해야겠구나. 그늘진 곳에 웅크린 그 모습이 어떨지 조심스레 상상했다.

다 자란 어른 안에 사는 어린아이. 나 역시 존재하는 아픈 부분인데 이상하게도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멀어지고 싶은 한 사람만이 떠올랐다. 그녀 안의 어린아이, 소녀, 숙녀를 차례대로 그려봤다. 참 예쁘고 딱했으리라. 내가 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지난날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아릴 수 있었다.      


그녀를 미워하게 된 건 내가 그녀와 같은 처지가 된 이후였다. 과정은 달랐으나 결과가 같았기에 자격지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토록 친했건만 불편해졌다. 내가 어른이 된 탓이었다.

한 번도 말한 적 없지만, 그녀도 내가 거리 두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거다. 으레 사랑에 목마르고 인정받고 싶은 사람일수록 눈치가 빠른 거 아닌가. 지난 모든 세월 사랑받고 싶던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저물기 마련이다. 노을도, 사랑도, 사람도, 파도도. 한때 그녀의 푸르른 녹음이었을지도 모를 나는 가을 낙엽처럼 변한 것이다. 그녀 가슴에 바스락거리는 소란스러움만을 남긴 채.     



왜 그렇게 그녀가 어린아이 같이 유치할 정도로 사랑받고 싶어 안달인지 가만히 생각해 본 적이 많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살기가 어렵고 부잡스러운 나머지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충청도의 외갓집으로 보내게 됐다 했다. 그리하여 숨 쉬듯이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그녀는 아이의 정서와 기분에는 별 관심 없는 친척들 속에서 살아야 했다.      


“방 안에 다 모여서 앉아 있는데 말이지. 빨갛고 예쁜 사과를 깎아서 살은 자기 자식들만 주더라. 껍질에 살이 좀 붙었다고 나더러 그걸 먹으라 그랬어.”     


그래서 그 어린애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사과를 맛보고 싶어 껍질을 야금야금 씹었다고 했다. 조금 알 거 같았다. 그녀가 가을 겨울만 되면 왜 그렇게 사과를 사 먹는지 말이다. 사과 한 알을 아무렇지 않게 사 먹을 정도가 된 지금까지 얼마나 사무치면. 지금과 비교도 안 되게 그때의 사과 한 조각이 더 사각거리고 달았을 거다. 간절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사과를 먹어도 그때처럼 처절하지 않았으리라.

아이도 맛있는 걸 알고 사랑과 관심을 느끼는데. 맛있는 것도, 사랑과 관심도 받지 못하는 그 비참함을 너무 어린 나이에 느낀 게 아닐까.

하루 한 알씩 먹으며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무언가가 분명 있을 거다. 얘 아가, 이리 와서 사과 좀 먹어. 먹고 양치 잘하고 자야 한다. 좋은 꿈 꾸고 잘 자.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자고 혼자 일어나 혼자 놀아야 하는 아이에게 그 정도 애정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싶다.


웃풍이 사나운 시골집. 따뜻한 아랫목도 아닌 서늘한 윗목 구석에 앉아 사과껍질을 씹는 아이를 떠올리면 당장에 데려와 따뜻하게 씻기고 머리칼을 빗겨 원 없이 사과를 먹인 뒤, 온수 매트를 튼 침대 위에 올려놓고 솜이불을 덮어주고만 싶다. 그러곤 잠이 들 때까지 속삭여주고 싶다. 우리 예쁜 아가, 내일은 더 행복한 일이 많을 거야. 재잘대던 아이의 수다가 새근대는 숨소리로 바뀌면 꼬옥 안았다 놓아주고 싶다. 그 동그란 이마 위로 쏟아지는 별빛과 달빛을 기억해주고만 싶어 진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아놓은 홍옥이 시장에 나와 눈부시게 진열된 장면만 보면, 그녀는 분명 부사를 더 선호하지만. 아무튼 그런 순간을 상상하게 된다. 복숭아 같던 가녀린 솜털이 있었을 이마를 보면 별안간 손이 나가려고 움찔댄다. 그녀 아플 때 대체 누가 이마를 짚어줬을까.

이제는 사과로 즙을 내 고기 양념으로도 팍팍 쓰는데 그깟 사과가 뭐라고.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을 서럽게 할까.     



그 무렵의 그녀에겐 여동생이 있었다. 어렸던 그녀보다 더 어린 탓에 여동생은 서울의 부모님과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이 서울에서 내려오며 여동생을 데려오면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나도 엄마 아빠가 있다고 뻐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구박을 당한 거까지는 아닌데 내내 느낀 묘한 차별이 그땐 좀 나아졌으니 더더욱 기다려졌다고 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옷 몇 가지를 줄기차게 돌려 입고 돌려 입어 낡은 옷을 입고 기다리면, 서울에서 내려온 여동생이 레이스에 프릴 달린 새 옷을 입고 왔다고 했다. 살기 어렵다 해도 끼고 키우는 새끼 먹을 거, 입을 거에 신경 안 쓰는 부모가 어딨을까. 아마 그런 맥락으로 그녀의 여동생은 반짝반짝 그야말로 도시의 아이처럼 눈부셨을 거다.     


“저렇게 예쁘고 세련된 옷을 입고 온 애가 내 동생이라는 게 난 좋았어. 그 동네엔 그렇게 예쁘게 하고 다니는 애기들이 없었으니까. 너무 예쁘다, 이런 마음으로 계속 동생이 입은 옷자락만 만졌어. 부러웠나 봐. 근데 그 감정이 뭔지 몰랐던 거 같아.”     


부모님과 여동생이 서울로 돌아간 뒤, 어린 그녀가 잠자리에 누워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가늠해 봤다.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왜 안 데려가지? 언제쯤이면 데려가지? 이런 걸 헤아렸을까. 아니면 나도 예쁜 옷 입고 엄마, 아빠 손잡고 여기저기 다니고 싶다. 왜 나만. 난 왜 여기 있을까. 라며 속상해했을까. 어느 쪽이든 억울하다. 그리고 내가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이라 이랬으리라,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짐작만으로 끄덕일 순 없는 노릇이다. 물론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살기 버겁고 힘들어서 그랬다고 어물쩍 넘기기엔 다소 억울한 부분이 많다. 누군가 챙겨주고 기억해주지 못하는 어린 시절은 너무 쓸쓸하다. 모자란 자리를 어떻게 채웠을까. 본래 사랑이라는 건 받아도 받아도 받고 싶은 게 아니던가. 어릴수록 더더욱. 자기 몸집보다 큰 사랑을 한 입 거리 삼아 단숨에 먹어 치우고 그 힘으로 자라는 건데.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무력한 변명일 뿐이다.     


왜냐면 그녀는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자기 자식을 내팽개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한번 죽어보라고 코너에 몰리는데도 악에 받쳐 버티고 또 버텼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버텼다.     

그녀는 딸을 레이스와 핑크로 잔뜩 꾸미고, 아들이 열 살이 되도록 가슴을 만지게 내버려 두었다. 자식들이 공룡처럼 받아먹고 씹어 삼킨 큰 사랑은 어쩌면 그녀의 외로움과 결핍의 값일 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보니 어렴풋이 하나씩, 그녀의 그 기행을 조금 알 거 같다. 그러면서 동시에 두려워진다. 한 여자의 인생이 그리도 갈려 나갈 수가 있나.

멀찍이서 괜스레 그렇게 무서워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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