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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Apr 03. 2024

네 눈에  놈팡이

어떤 오해

2024. 4. 1.

< 사진 임자 = 글임자 >


"승진한 거 축하해."

"고마워, 근데 어떻게 알았어?"

"다 방법이 있지. 나한테 스파이가 있거든. 내가 다 알고 있었다고."


분명 오랜만인데 바로 어제 만난 사람처럼 우리의 수다 마라톤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올 초에 승진을 했다.

진심으로 진작에 축하해주려고 했었는데 어영부영하다 보니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미 그 세계에 없는 사람이지만 한때 같은 공간, 바로 옆자리에서 함께 근무하던 정을 생각하면 그녀의 승진이 남의 일(이 분명히 맞긴 하지만) 같지 않았다.(고 아마도 나 혼자만 느끼는 거겠지?)


"뭐야? 또 전화 잘못 눌렀어?"

"아니야, 제대로 눌렀어. 뭐 해?"

"뭐 하긴, 안정 취하고 있지."

"맨날 안정 취한대, 하여튼."


우리의 첫 대화는 대개가 이런 식이다.

안부를 궁금해하는 그녀와 시시껄렁한 영양가 쏙 빠진 말만 하는 나.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자기 할 일 하다가 한 번씩 연락이 될 때가 있다.

비록 출근하는 곳은 없지만 나 나름대로 할 일과 해야만 하는 일들이 많고, 아무래도 그녀는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니 어쩌다 생각이 난다고 해도 통화 한 번 하기는 쉽지 않다.

"날마다 뭐 해?"

"나야 늘 여러 가지 일을 하지."

"놈팡이가 뭐 한다고 바빠?"

"누가 나보고 놈팡이래? 말 조심해."

"놈팡이 맞잖아. 흐흐흐"

"함부로 말하지 마. 나 놈팡이 아니다.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뭐가 그렇게 바빠?"

무직자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단어는 바로 '놈팡이'이다.(라고 나는 늘 주장해 왔다)

사람들은 곧잘 오해한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놈팡이'가 아니다.

나도 하는 일들이 많다, 고 늘 이 연사 힘차게 외치지만 누구 하나 귀 기울여 듣는 이 없긴 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내가 내 할 일 잘하고 있으면 그만인 거지.

놈팡이란 말에 살짝 흥분하려 하기 전에 구구절절 내가 얼마나 하는 일이 많은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얼마나 바쁜지 살짝 브리핑을 했다.

"아, 바쁘게 살고 있구나. 진짜 하는 일 많다."

그녀는 나의 일장연설 끝에 그렇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근데 이사는 안 가?"

또 느닷없이 이사 타령이다.

걸핏하면 내게 이사 안 가냐고 묻는 그녀다.

"3억만 땡겨 줘 봐. 자본이 있어야 가지. 그리고 이사 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


솔직히 나는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사 갈 만한 '자금'도 '전혀' 없다.

지금 이 동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아주 쏙. 결코 자금이 없어 합리화하려는 건 아니다. 믿어주길 바란다.

도서관 있지 관공서 있지 매일이라도 오르고 싶은 동산 같은 산도 있지, 수변공원도 있지, 부족한 게 없다. 그런데 내가 이사 가긴 어디로 가겠냔 말이다.

사람들은 섣불리 말한다.

장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한가할 거라고.

는 일 없이 놀고먹을 거라고.

그렇지만 '그건 니 생각이고',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그저 남의 일일 뿐이 아니던가.

때때로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당장 내 코가 석자인 판국에 남의 일에 오지랖을 떠는 그런 해괴망측한 일을 볼 때면 내 일도 많고 바쁜데 저렇게 남의 일에 상관할 시간이 있을까.(하면서도 지금 나는 그런 남의 일에 상관하고 있다는 게 또 놀라울 따름이다. 이건 어쩌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보다, 인간에게는 남의 일에 오지랖 떨 의무가 있으니까)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도대체 뭐 하고 사는지'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2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하다.

"그냥 잘 있나 궁금해서..."

라고 말끝을 흐리지만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맞벌이에서 외벌이가 됐으니 수입도 반토막 난 마당에 잘 지낼 리가 있겠어? 분명히 후회하고 있겠지? 경제적으로 힘들어 허덕이며 살고 있겠지? 아마도 이런 생각들일지도 모른다.


남들은 나보고 놈팡이 내지는 백수라고 하지만 내가 아니니까 된 거다.

굳이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고 항변할 필요도 없겠지만,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무사하다는 거다.

중요한 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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