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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r 31. 2024

어머나! 길러서 남 주자

남 줘도 좋은 일

2024. 3. 30.

< 사진 임자 = 글임자 >


"얘들아, 결심했어. 엄마 머리 길러야겠어."

"갑자기 웬 머리?"

"머리 길러서 엄마도 기부하고 싶어."

"머리카락도 기부하는 거야?"

"응, 할 수 있대. 더 자세히 알아봐야지."


'어머나 운동본부'를 검색해 보았다.(어린 암환자를 위한 머리카락 나눔 운동의 약자다)

매일 4명의 소아암 환자가 발생한다고 한다.

일반인들로부터 25cm 이상의 머리카락을 30 가닥 이상 기부받아서 어린 어린 암환자의 심리적 치유를 돕기 위해 맞춤형 가발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매년 1,500여 명씩 20세 미만의 어린 암환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머리를 고무줄로 묶고 잘라서 서류 봉투나 작은 상자에 담아 등기나 택배로 어머나 운동본부에 '선불'로 보내주면 끝이다. 발송 후에 머리카락 기부 신청서를 작성하면 인증(약 1주일 정도 소요) 후에 기부 증서도 홈페이지에서 직접 출력할 수 있다고 안내되어 있다.


얼마 전 '입이 트이는 영어'를 듣던 중이었다.

그날 사연의 주인공은 소아암 환자에게 기부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기르는 중이라고 했다. 갑자기 머리에서 번쩍했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전부터 막연하게 머리카락 기부에 대해 생각해 왔다. 아주 질이 좋은 머리카락은 아니더라도 특별히 손상되거나 이런저런 시술에 지친 상태는 아니었으므로 나름 건강하다고 자부하고 있다, 물론 나만.

이젠 흰머리가 여기저기 돋아나고 있지만 그건 관자놀이 쪽에 거의 한정됐을 뿐이니까 다른 부위는 그래도 제법 쓸 만할 것이다.

최근 2년 동안 인위적으로 펌을 했다거나 염색도 하지 않았으니까 해롭진 않겠지?

작년 여름쯤에 짧게 단발로 직접 자르고 또 길이가 어중간해져서 다시 잘라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그날 '입트영' 방송을 듣고 마음을 달리 먹었다. 당장 기르는 건 조금 귀찮은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내 머리카락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야. 물론 내 바람대로 다 받아줄지 어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하지만 일단 시도는 해 보기로 했다.


"합격아, 엄마 머리카락 길러 볼 생각인데 넌 어때? 혹시 너도 해 보고 싶지 않아?"

"난 싫어."

아무리 그럴 마음이 없어도 그렇지 저렇게 단칼에 거절해 버리다니.

하지만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 내가 해 볼까? 나도 누나처럼 머리 길러보고 싶어. 맨날 이발하는 것도 귀찮아."

생각지도 못한 멤버가 불쑥 참여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왔다.

"우리 아들은 머릿결도 좋고 건강하니까 하면 좋긴 하겠다. 근데 몇 년 정도는 길러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머리카락이 길면 좀 답답하고 불편할 수도 있어. 괜찮겠어?"

아들이고 딸이고 나를 닮은 건지(지금은 한낱 라떼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머리숱이 풍성한 남매는 언제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뽐냈다. 솔직히 아들의 머리카락도 탐나긴 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머리카락을 기를 까지 아들이 잘할 수 있을까?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아들이 한다면 엄마는 좋지. 하지만 신중히 잘 생각해 봐. 25cm 이상은 길러야 한대. 심는 데 머리카락이 많이 줄어든다고 하더라. 우리 딸도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억지로 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어휴, 엄마 또 뭘 들은 거야? 갑자기 웬 머리카락 기부야?"

딸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큰둥했다.

"오늘 입트영 듣는데 그 사연이 나오더라. 그 사람은 머리카락을 기부할 거래.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엄마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한 번 해 볼만 한 것 같더라."

어떻게든 딸을 설득해보고 싶어 나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봤다.

결과는 참담했다.

한 번 동참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딸은 쉽사리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아깝다, 딸의 것은 내 머리카락 숱의 두 배인데. 딸만 동참해 준다고 하면 이건 완전 횡재인데. 새까맣고 싱싱하고(?) 윤기 넘치는 그 머리카락을 보면 기운이 다 펄펄 날 지경인데.

이렇게 안타까울 데가...

"엄마, 말 나온 김에 그냥 나 머리나 좀 잘라 줘. 너무 많이 길었어."

그래봤자 이제 어깨 아래로 살짝 내려온 것뿐인데 애초에 나의 바람을 단념시키려는 의도인지 딸은 자꾸만 이발을 요구해 왔다.

"괜찮은 것 같은데? 지금 잘라버리면 여름에 더울 거야. 차라리 길어서 하나로 묶어 버리는 게 제일 시원해."

어디까지나 내 생각뿐이지만 나는 최대한 딸의 이발을 미루고 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다소 원망을 사더라도 최대한 늦출 수 있는 데까지 늦춰서 1cm라도 더 길러주기를 바란다.

나도 지금 생각으로는 30cm 정도 길러볼 생각인데 그러면 2년 이상은 걸릴 것 같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3년 전에 30cm도 넘게 길렀었는데 너무 치렁치렁해서 잘라버린 적이 있다.


가끔 왜 이제야 이걸 알았을까 안타까울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지.

그리고 이왕 알았으니 노력해 봐야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나누는 것은 대개가 그렇다.

많이 가지지 않아도, 흔한 것 같아도, 대단할 것 같지 않은 것이라도 나누는 순간 그 값어치는 이루 따질 수 없을 만큼 커지는 것 같다. 그냥 두면 어차피 자라나는 머리카락이다. 잘라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면 한낱 쓰레기밖에 안 된다. 하지만 몇 년 잘 기르면 소중하게 그 쓰임새를 찾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어느 누구에게라도, 어떤 식으로라도 보탬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늘 그렇게 살고 싶다, 일단은 머리카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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