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May 23. 2024

드디어 딸이 일요일에 나가겠다고 했다

어떤 비보

2024. 5. 22.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우리 일요일에 무슨 계획 있어?"

"아니, 왜?"

"친구들이랑 만나기로 했어."

"그래?"

"나 놀다 와도 돼?"

"그래. 아직 확실한 계획은 없으니까. 그리고 네가 먼저 약속 잡았으니까."


딸의 초등인생 6년 만에 처음으로 주말에 친구들씩이나 만나러 나가겠다고 했다.

이젠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할 때라는 걸 안다.


"근데 친구들이랑 뭐 하고 놀 거야?"

"편의점 가지."

"가서 뭐 해?"

"먹겠지."

"그리고?"

"동전 노래방 가기로 했어."

"그래?"

"그리고 놀이터도 갈 거야."

"근데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데."

"괜찮아, 어릴 땐 다 그러고 노는 거지 뭐."

"그래,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그래도 항상 조심해. 누구누구 만나기로 했어?"

딸을 포함해서 총 다섯 멤버가 일요일에 뭉치기로 했단다.

여학생들끼리만 놀기로 했다는데 어른도 없이 괜찮을까?

은근히 걱정부터 됐다.

세상이 워낙 흉흉해야 말이지.

지금까지 딸이 주말에 친구와 놀겠다고 혼자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몇 년 전에는 남동생을 대동하고 합기도에 같이 다니는 동생들(딸 또래는 없었고 다들 동생이었다)을 만나서 놀겠다고 해서 그때는 더 어렸기 때문에 그리고 아들은 더더더 어렸기 때문에 남매만 밖에 내보낼 수 없어서 내가 항상 따라 나가서 멀찌거니 앉아 아이들을 봤다.

언제까지 딸을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데 혼자 나가서 놀게 해도 괜찮으려나?

뉴스를 보면, 하필 유쾌하지 못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기도 해서 살짝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온 얼굴을 스카프로 친친 두르고 남몰래 뒤따라 나가봐야 하나? 어울리는 친구들이 어떤 친구들인지 얼굴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근데 친구들이 다 그때 모일 수 있대? 먼저 부모님께 허락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제 받겠지."

"그래. 재미있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락은 했지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게 사실이다.

딸에게는 최근 들어 친하게 지내는 네 명의 친구들이 있다.

하나하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봤다.

"OO이는 이름 처음 들어 보는데 어떤 친구야?"

"올해 처음 같은 반 됐으니까 처음 들어보지."

"OO이가 그중에서 제일 친하겠네? 벌써 두 번째 같은 반 된 거잖아. 합기도 학원도 같이 다녔고. 집도 우리 집 바로 근처고."

"엄마, 세 번째 같은 반이야."

"그래구나. OO이는 저번에 같이 버스 타고 '다 있소' 간 친구지? "

"응, 버스 잘 타고 다니나 봐."

"OO이는 어때? 그 친구 얘기는 별로 안 들어 봤는데."

"응, 올해 같은 반 돼서 나랑 친해졌어."

"그래, 우리 합격이가 올해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네. 정말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 한 두 명만 있어도 인생 성공한 거라고 하더라. 친구는 무조건 많을 필요도 없고 서로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친구 딱 한 명만 있어도 좋대."

"엄마도 친구 있잖아."

"응, 있지. 좋은 친구가 있는 것도 큰 복이야. 그치?"

"그렇지."

"우리 딸이 앞으로 그런 좋은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다."


딸은 일요일만 기다리면서 신이 났다.

"그럼 용돈을 좀 챙겨가야겠네? 얼마나 필요할까?"

"그래서 말인데, 엄마. 나 용돈 좀 올려 주면 안 돼?"

"얼마나?"

"지금 2만 원이니까 만원 더 해서 3만 원 어때?"

"그래? 생각 좀 해 보자."

"내 친구들은 용돈 많이 받던데. OO이는 하루에 3천 원씩 받는대."

"그럼 한 달에 9만 원이나 받는다는 거야?"

"응."

"하루에 3원은 얼마 안 되는 것 같아도 한 달 모으면 적은 돈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OO이는 한 달에 3만 원이래."

"그래? 그럼 OO이는?"

"2만 원 받는대."

"너랑 똑같네. 그럼 OO이는 한 달 용돈이 얼마래?"

"몰라, 안 물어봤어."

"당장 용돈 올리는 건 좀 그렇고 아빠랑도 얘기해 봐야지. 2만 원 정도면 초등학생 용돈으로 괜찮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건데 더 생각해 보자."

딸은  본 김에 제사까지 지내려고 했다.(고 어쩌면 나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 없이 친구들끼리만 만나서 놀기로 한 대망의 그날을 불과 며칠 앞두고 어제 하교한 딸이 시무룩하게 돌아와 비보를 알렸다.

"엄마, 일요일에 친구들이 못 논대."

"왜?"

"OO이는 일요일이 미용실 쉬는 날이라(부모님이 미용실을 운영하신다) 안되고, OO이는 어디 간대. OO이는 일이 있다고 하고, OO이는..."

"어떡해, 우리 합격이가 일요일만 기다렸는데 아쉽겠다. OO이는 평소에 주말에 아무 데도 안 가고 집에만 있다고 하더니 하필이면 이번주에는 스케줄이 생긴 거야?"

"그런가 봐."

"어쩔 수 없지 뭐. 우리도 다른 계획이 생길지도 모르고 다른 계획이 없으면 집에서 푹 쉬어도 되지 뭐. 책이나 실컷 보면서 엄마가 맛있는 음식 해주면 먹고 놀자. 어때? 어차피 더워서 밖에 나가봐야 고생이야. 시원하게 집에 편히 있자."

신포도, 신포도야, 어차피 먹어봤자 신포도, 혼자만 실컷 합리화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좋지."

라고 대답하는 딸은, 하지만 정말 너무 시무룩해서 내가 아무 백지수표라도 남발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날도 더워지는데 스카프로 무장하고 일요일에 외출할 일은 없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랜만이야, 천연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