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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10. 2024

내 고장 11월은 땅콩 캐는 계절

옛날 땅콩 밭에서는 안 그랬는데

2024. 11. 9.

< 사진 임자 = 글임자 >


"애들은 안 왔냐?"

"응."

"고놈들 같이 데리고 오지 왜 안 데리고 왔냐."


나 혼자만 땅콩밭에 들어서자 아빠는 물으셨다.

탁 트인 들판 멀리서부터 딸 혼자만 쓸쓸히 걸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먼발치에서 이미 보고 계셨으면서 굳이 물어보셨다.

나만 괜히 멋쩍어졌다.

양쪽에 아들 하나, 딸 하나 손에 손 잡고 갔어야 했는데, 아니 같이 갔으면 좋았을 것을...


"이번 주말에 애기들이랑 같이 와서 땅콩 캐라. 땅콩이 많이 달렸더라."

며칠 전 엄마가 또 나의 주말 스케줄을 확정 지어 주셨다.

"알았어. 애들한테 말해 볼게."

하지만 더 이상 외손주들은 그런 종류의 체험학습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미 할 만큼 다 해 봤다, 기원전 5,000년 경에.

캐 볼만큼 캐 봤고 따 볼 만큼 따 봤고, 구경할 만큼 구경도 했으며 먹어 볼 만큼 먹어 봤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같이 가자고 유혹을 해도 내 잔꾀에는 잘 안 넘어온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얼마나 자신들을 기다리는지 잘 알면서 한 번씩 가자고 하면 얼마나 튕기는지 모른다.

어릴 때는 그렇게 가자고 졸라대더니, 이젠 제발 같이 가 달라고 애원하고 붙들어도 야멸치게 거절하기 일쑤다. 이런 걸 고급전문 용어로 '배가 불렀다'라고 한다지 아마?

한 밤만 자고 가자고, 오늘 갔는데 내일 또 가자고 외가에 도대체 무슨 보물단지라도 숨겨 둔 아이들마냥 정말 귀찮을 정도로 가자고 노래 부르던 때가 정말 얼마 전 같았는데 말이다.

지금 아이들이 같이 땅콩 밭에 간다고 해도 썩 도움이 되지는 않긴 할 것이다.

5분 정도나 버틸까?

어릴 때는 땅콩이 주렁주렁 달린 그 모습만 보고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따금씩 정체 모를 것을 발견하고 땅콩도 아닌 것이 금은보화도 아닌 것이 어린것들 눈에만 뭔가 대단하게 보여서 그것이 '만에 하나' 황금 덩어리는 아니냐고 '우리 이제 부자가 된 게 아니냐고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다 지난 일이다.

땅콩을 캐다가 굼벵이를 보고 정말 굼벵이에게 구르는 재주가 있는지 지켜보자고 하기도 하고(아무리 기다려도 그러나 굼벵이는 굴러주시지 않았다, 다만 굼벵이가 굼뜬 것만은 확실하게 똑똑히 목격했을 뿐이다) 남매가 서로 누가 더 많이 땅콩을 따는지, 땅콩을 가득 담은 그릇들 중에서 서로 많은 것은 자기가 들겠다며 누가 더 힘이 센지 대결하자고 호기롭게 도전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는데 말이다.


어린것들이 빠진 땅콩 밭에는 침묵만 흘렀다.

부모님과 나는 별말 없이 땅콩을 캐고 땄다.

갑자기 침묵을 깨고 아빠가 한마디 하셨다.

"왜 안 왔냐?"

아니, 이미 끝난 일 아니었나?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셨나 보다.

"일어나지도 않았다네."

그건 사실이었다.

딸은 내가 집을 나설 때까지도 방에서 자고 있었다.

아들은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났지만 나와 동행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내게 전달했고 말이다.

전날 아이들에게 땅콩 따러 가자고 했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만장일치로 거절하셨다.

"와서 같이 땅콩도 따고 그럴 것이제, 왜 안 왔어?"

아빠는 못내 아쉬우신 모양이다.

땅콩은 핑계고 그저 손주들 보고 싶어서 그러시는 게지.

아이들이 없어서 그런지 전에 같이 할 때와는 다르게 일이 더디게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세상 단순한 반복 작업이기도 했거니와 옆에서 재잘대는 사람이 없으니 재미도 없고 말이다.


양도 얼마 안 되는 것 같더니 꼬박 하루 동안 세 명이서 작업했다.

지난주에 땅콩 알이 얼마나 여물었나 확인차 캐놨던 마당의 땅콩을 가리키며 엄마는 말씀하셨다.

"갈 때 먼저 캔 놈 좀 가져가라. 갖고 가서 우리 애기들 줘라."

오지도 않겠다는 손주들이지만 그래도 친정 부모님은 항상 '우리 애기들, 우리 애기들' 이러면서 바리바리 싸 주신다.

상추, 도토리묵, 치커리, 호박, 찹쌀, 달걀, 녹두, 가래떡, 고구마, 시금치, 이렇게나 많이 또 챙겨 왔다.


역시,

땅콩은 핑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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