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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04. 2024

치밀한 시어머니

조용한 계획

2024. 12. 3.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내가 느이 큰 새언니한테 다 말해 놨다."

"뭘?"

"이번 주 토요일에 김장한다고 했다."

"언니 모르게 오기 전에 다 해 버린다며?"

"언니가 어느 세월에 오겠냐. 오믄 이미 김장 다 끝나 있제."

"하긴 그렇겠네."

"아무리 빨리 와도 저녁 다 돼서 올 것인디 그때까지 김장하고 있겄냐? 너랑 나랑 다 해야제. 너는 토요일에 일찍 와라."


아, 그러니까 엄마의 말씀인즉 두 며느리들에게는 대놓고 이번 주 토요일에 김장을 하겠다고 말해서 안심시켜 놓고(?) 아들 며느리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얼른 해치워버리겠다 이거로군.

물론 딸인 나는 예외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요원이 될 테고 말이다.

알았다.

이제 알았다.

바로 이거였어, 엄마의 빅 픽처는.


"어째 새우젓이 안 온다냐. 얼른 와야 언니들 오기 전에 김장 다 할 것인디."

내게 특별히 새우젓을 주문하라는 사명을 주시고 엄마는 이제나저제나 새우젓 오기만 기다리고 계셨다. 새우젓이 제때 와야 며느리들에게 안 들키고(?) 일을 끝낼 수 있다.

"오늘 온다고 합디다."

다행히 택배가 도착한다는 문자를 오전에 받은 나는 엄마를 최대한 안심시켰다.

이번에도 며느리들 몰래 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이다.

"하도 언니가 물어봐서 말했다."

절대 김장 날짜를 가르쳐 주지 않는 시어머니와 반드시 그 길일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며느리라니!

서로 어지간히 포기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물론 내 눈에만.

"막둥이네도 그날 온다고 하더라."

"엄마, 저번에 OO엄마는 와서 김치 만들어 갔는데 또 와? 12월에 바쁠 것 같다고 그래서 그때 온 거 아니었어?"

물론 여기에서의 '또'라는 말의 의미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그것이 절대 아니란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실은 2주 전쯤 동생네가 부모님 집에 왔었다. 아무래도 12월에 못 올 것 같다고 시간 될 때 미리 온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때 파김치 담근다고 파도 다 다듬었고 깍두기도 만들어 갔었는데 힘들게 굳이 뭐 하러 또 올까 싶었다.

"또 온다고 하더라. 와서 새 김치 갖고 가믄 좋제."

하긴 엄마는 아들이 한 번이라도 더 오면 좋은 건가?

저번에는 배추김치가 없었으니 어차피 이번에 김장을 하면 와서 가져가든지 택배로 보내든지 해야 하니까 또 오는 건가 보다. 게다가 엄마는 김치는 자고로 최대한 빨리 바로 집에 가져가서 김치 냉장고에 넣어 둬야 안심인 분이다. 택배를 통해서 하루 걸러 아들 며느리에게 당도하는 일은 가급적 허락하지 않으신다. 다른 김치는 몰라도 특히 김장 김치만큼은. 며느리들 오기 전에 일은 다 끝내 버리고 싶고 당장 그 김치를 먹이고도 싶고 그래서 고안해 낸 방법이 이 방법인 거다. 친정 식구가 다 모이기 직전에 김장을 다 끝내 버리고 아들, 손주, 며느리는 잠만 자고 얼른 다음날 보내는 것, 내가 보기에도 그럴싸하다.

첫째 며느리와 막내며느리는 일단 김장 날짜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에게는 아직 전달되지 않았나 보다.

분명히 엄마가 말씀 안 하셨을 거다.

친정과 가까이 사는 둘째 오빠네는 종종 집에 들르기 때문에 어쩌다 들렀는데 우리가 김장을 하고 있었을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당장 작업에 돌입하면서 새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 미리 말씀을 하시지. 아무 말씀 안 하시길래 아직 안 하는 줄 알았는데요."

그러면 엄마는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런 것을 뭐 하러 말하냐. 이까짓 거 얼마나 된다고."

하긴, 150 포기 정도밖에 안 될 때긴 하다.

조용한 김장이란 바로 이런 것이란 말인가.

오늘도 둘째 새언니는 내게 말했다.

"김장할 때 갈게요. 언제 하면 얘기해 주세요."

시어머니는 절대 말해주지 않으니 시누이인 나를 공략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겠다고만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엄마랑 내가 이렇게 조용히 일을 벌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이참에 애기들 오믄 또 용돈이라도 줘야제."

엄마는 또 벌써부터 현금을 인출해 두셨다.

만원 짜리와 오만 원짜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엄마에게 손주들 오는 날은 용돈 주는 날이다.

손주들 사방에서 까불고 놀며 정신 사납다고 그러시더니 그래도 줄 건 확실히 주겠다는 할머니, 우리 엄마, 친정 며느리들의 시어머니.


김장 계획도 치밀하게, 용돈 챙겨 주는 것도 치밀하게, 이토록 치밀한 시어머니.

올해도 계획대로 차질 없이 착착 진행되어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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