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도 어쩔 수 없는 시어머니인가 봐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이것도 언니가 사 줬어?"
"이것을 언니가 사 줬겄냐? 오빠 돈으로 샀지!"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항상
"요새 저런 며느리 없다."
라든가
"OO이 어매가 고생 많이 하고 산다."
라는 말로 맏며느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줄 알았었는데, 아니었나?
나 혼자만 착각하고 있었던 건가?
우리 엄마가 저렇게 말할 줄은 정말 몰랐다.
제발,
제발,
백 년 후에라도 이 글만은 부디 큰 새언니에게만은 발각되지 않기를...
만에 하나 발각되더라도 너그러이, 스리슬쩍 넘겨주기를...
평소에도 부모님께 이런저런 선물을 자주 가져다주는 큰 새언니였다.
그날 어떤 선물을 보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의 반응만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난다.
며느리가 사 온 것이라고 해도 결국 그 돈은 아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며느리는 당시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며느리가 번 돈으로 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당신의 큰아들이 번 돈으로 며느리가 샀다는 것이다.
이런!
엄마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군.
안 되겠어.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어.
우리 엄마가 정말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래서는 안 되는데, 어쩜 듣는 딸까지 섭섭하게 저러실까나.
잠깐 오지랖 좀 펄럭여줘야겠다.
"엄마, 엄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냐?"
"언니가 사 준 건데 왜 그렇게 말하냐고?"
"내 말이 어쨌다고 그러냐? 느이 언니는 일 안 하는데 무슨 돈이 있어서 샀겄냐? 다 우리 큰아들이 벌어서 준 돈으로 샀제!"
알겠어요, 알겠어요, 무슨 말하시는지 알겠지만 그건 엄마 생각이시고요.
그 말뜻은 충분히 알겠고요.
"엄마. 오빠가 돈 버는 게 그냥 저절로 벌어지는 줄 아슈? 언니가 집에서 애들 잘 건사하고 착실히 살림하고 그렇게 집에서 며느리가 받쳐주니까 아들도 밖에서 일 잘하고 있는 거 아니야? 한 사람만 잘한다고 집이 잘 굴러 가? 언니가 직장 안 다닌다고 돈 안 번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라니까! 집안일하는 것도, 애들 키우는 것도 다 돈 버는 거야! 그게 진짜 돈 버는 거야.언니 덕분에 오빠가 일 잘 다니고 있는 거라고! 아무리 언니가 밖에서 일 안 한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오빠만 힘들게 일하는 거 같아? 언니도 집에서 아들 셋 키우려면 힘들다고. 아들이 셋이나 된다고!"
가볍게 사실만 나는 말했다.
마지막에 쓰잘데기 없이,
"언니가 어쩔 때는 '아들이 셋이 아니라 넷인 것 같다'고 한숨 쉽디다!!!"
라는 말 같은 건 입도 뻥끗 안 했다, 물론.
세 아들은 언니 의지로 낳았다손 치더라도 본인이 낳지도 않은 시어머니의 아들을 (종종) 아들처럼 키우는(?) 새언니가 딱하지도 않수? 엄마도 아빠랑 살아 봐서 알 거 아니야?
정말 딱한 사람은 그러나, 정작 당시에는 우리 엄마였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곤란해요, 아주 곤란합니다.
엄마도 딸이 있으면서 어쩜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걸까?
그동안 큰며느리 칭찬했던 건 모두 인사치레였을 뿐이었던가?
이것 참 혼란스러운걸.
엄마는 내 반격(?)에 또 예의 그날처럼 한동안 침묵하셨다.
"엄마 큰아들은 결혼시키고 싶으면서 딸한테는 장남하고 결혼하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라고 거침없이 말하던 기원전 3,000년 경의 그날처럼 말이다.
"엄마, 아무리 며느리가 밖에 나가서 돈을 안 번다고 해서 그게 돈을 안 버는 게 아니라니까! 꼭 나가서 돈을 벌어야 돈 버는 거야? 언니도 집에서 돈 벌고 있어. 지금 언니가 집에서 애들 키우고 살림하는 게 다 돈 벌고 있는 거야."
"너는 내가 뭐라고 했다고 그러냐?"
"엄마, 우리 어머님이 엄마처럼 말하면 엄마 기분이 어떻겠어?좋겠어? 내가 직장 안 다니고 집에 있다고 아들이 힘들게 혼자 번 돈으로 며느리가 산다고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좋겠냐고? 응?"
정말 나는 아무 연관도 없는 나의 시어머니까지 들먹이며 치를 떨었다.
당시에는 나도 맞벌이였지만 만에 하나 우리가 외벌이였다면, 지금 큰 오빠네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런 상황에서 시어머니께 저런 비슷한 말씀을 듣는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쳤다. 물론 나의 시어머니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는 믿음은 있다. 이것도 물론 나만의 확신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엄마, 날마다 새언니보고 아들 셋이나 키운다고 고생 많이 한다고 그러더니 그렇게 말할 땐 언제고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해? 언니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분 안 좋겠어? 행여라도 언니 앞에서는 절~~~~ 대 그런 말 하지도 마슈! 알았지? 어디 밖에 나가서도 그런 말 하지도 마. 알았지? 남들 앞에서도 하지 마슈!"
"안 한다, 안 해."
"진짜로! 절대 언니나 다른 며느리들 앞에서도 그런 말 하지도 마. 알았지?!"
당시 엄마의 세 며느리는 모두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있었다.
행여라도 다른 며느리들에게 비슷한 발언이라도 할까 봐 나는 미리 쐐기를 박았다.(고 생각했다.)
시월드의 평화는 (소심하게) 시누이가 지킨다.
"안 한다고."
그러나 거듭 신신당부하는 나의 부탁을 가장한 강요에 엄마의 대답은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엄마, 진짜 요즘 새언니 같은 사람 없어. 엄마가 그랬잖아. 진짜 세상에 별의별 며느리들 많아. 언니 정도면 진짜 괜찮은 거야. 요새 어디서 저런 며느리를 봐? 응?"
"알았다, 알았어."
"아무튼 다음에는 절대 그런 말 꺼내지도 마. 알았지? 언니가 아들들 키우고 산다고 얼마나 고생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집 안 나가고 오빠랑 살아 주는 것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진작 집 나갔어. 나라도 진작 나갔겠다. 나 같으면 같이 못 살아.(큰 오빠네는 나만 아는 우여곡절 및 파란만장 가정사가 있다.) 누가 오빠랑 살겠어? 언니나 되니까 같이 살아주는 거야.(엄마도 백만 분의 일 정도는 큰아들네 가정사를 알고 계신다. 물론 새 발의 피일뿐이지만. 엄마의 정신건강을 위해 일단 비밀로 하기로 했다. 만약 엄마가 그 일을 다 알게 되신다면 꿈에서라도 저런 말씀은 절대 절대 못 하실 거다.) 오빠 성격 알면서 그래?"
"아따! 너 진짜 잔소리 많다."
"그러니까 절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알았지."
"알았다고, 이것아! 그만해라."
"요즘 누가 시가에 언니같이 잘해? 언니는 정말 잘하는 거야. 그래, 안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하라고."
"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하라고."
"아이고, 어디서 시어매가 인자사 하나 나와갖고는."
엄마는 급기야 자리를 뜨셨다.
"느이 새언니 죽순 나물 좋아하니까 좀 많이 해 놔야쓰겄다."
쳇!
죽순 나물은 하나밖에 없는 당신 딸도 좋아한다고요!
그날 이후,
내가 아는 한,
적어도 내 앞에서라도,
엄마는 저런 천부당만부당 하신 말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말씀같은 건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