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큰며느리만 예외인 거죠?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내가 이번 추석에는 오지 말라고 했다."
한 달 정도 전에 엄마는 내 앞에서 결연하게 말씀하셨다.
허리 시술을 하시고 병원에서 일하지 말고, 무리하지 말라는 얘기를 듣고 단단히 결심한 듯 보였다.(고 또 나는 그만 혼자서 착각하고 말았다.)
"그래. 이번에는 나도 안 가니까 엄마도 쉬어. 뭐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계셔.""
"그럴란다. 아무것도 안 할란다."
"근데 며느리들한테 확실히 말했어?"
"친정에나 가라고 했다."
"그래? 이번엔 연휴 기니까 다들 놀러 갔다 와도 되겠네. 엄마도 뭐 하지 마슈. 올 사람도 없는데 그냥 쉬면 되겠네."
"안 오긴 어째 아무도 안 오냐? 큰오빠랑 새언니랑 우리 애기들은 오제."
"오빠랑 언니가 온다고 했어?"
"온다고 하나 안 하나 오제 어째 안 온다냐?"
"그건 엄마 생각이고. 다른 며느리들은 안 와도 된다고 하면서 큰며느리는 왜 기다려?"
"큰 언니는 올 것이다."
"엄마. 설마 오라고 했어? 언니도 다른 계획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시끄럽다. 너는 나중에 무나 두 개 사 와라. 깍두기 담가 놨다가 언니 오믄 줄란다."
엄마가 잘 나가시다 왜 이러실까?
세 며느리에게 모두 공평해야 하는 거 아닌가?
둘째와 막내며느리에게는 친정에 가든지 여행을 가든지 아무튼 시가에는 안 와도 된다고 못을 박으시더니 왜 큰 며느리한테만 저러시는 거지?
"엄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빠한테 물어봐. 다른 스케줄이 있을지 모르잖아? 언니한테 전화하지 말고 오빠한테 해."
"전화 하나 안 하나 오빠가 오제 안 오겄냐?"
"그거야 모르지."
"여기 아니믄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안 오겄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물어보라고."
"물어보나 마나 올 것이다."
"언니도 오랜만에 좀 푹 쉬라고 하지."
아무리 연휴가 길다 한들 며느리 입장에서는, 시가에 한 번 다녀와야 하는 입장이라면 그냥 연휴는 연휴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우리 OO이가 고3인디 어디 놀러나 가겄냐?"
"맞다. 고 3이지. 그런데도 온대?"
"저번에 갔을 때 추석 때 할머니 보러 온다고 하더라."
한 달 정도 전에 엄마는 큰 오빠네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자랑스러운 엄마의 맏손주가 그렇게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한다.
"얼굴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뭐 하러 또 와. 한 번 오려면 그것도 일인데. (물론 아무 상관없는 내 생각에는) 이번에 얼굴 봤으니까 안 와도 될 것 같은데. 수능이 낼모렌데?"
"너는 무슨 잔소리가 그라고 많냐?"
"20년 동안 왔으면 됐지. 이제 언니도 한 번 정도 쉬어도 되지."
"잔소리 말고 너는 무나 사 와라. 까마귀 고기 먹지 말고."
"알았어. 근데 왜 무를 두 개나 사?"
"다 느이 언니 김치 담가 줄라고 그러제."
"언니가 깍두기 먹는대?"
"먹제, 왜 안 먹는다냐?"
"먹을지 안 먹을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주지 말라니까?!"
"어째 깍두기를 안 먹냐?"
"혹시 모르니까 아무튼 물어보고 줘. 괜히 김치 담갔다가 안 가져 가면 그걸 누가 다 먹어? 나도 안 갖다 먹을 건데."
"그런 것을 뭐한디 물어보고 말고 한다냐. 주믄 다 먹제."
"그건 엄마 생각이라니까. 그리고 냉장고에 자리가 있어야 김치도 가져가지."
"그거 한 통 넣을 자리 없겄냐?"
"없을 수도 있지. 나도 지금 냉장고에 자리 없어."
"너는 냉장고에 뭣을 그라고 많이 넣어 놓고 자리가 없다고 그러냐. 잔말 말고 무나 사 와라."
"엄마. 엄마가 준다고 며느리가 무조건 다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우선 물어봐. 물어보고 언니가 달라고 하면 그때 줘. 괜히 헛고생하지 말고. 무조건 다 물어봐. 달라고 하는 것만 줘."
"언니가 너 같은 줄 알냐? 다 가져가서 먹는다."
엄마랑은 말이 안 통한다.
자고로 한 번도 시가에서 반찬을 가져다 먹지 않은 며느리는 있어도 시가에서 준 반찬을 다 못 먹고 결국 버리게 되거나 애초에 사양을 못 하고 무조건 가져와서 먹지도 않고 어쩌다 보니 방치하게 된 경우가 한 번도 없는 며느리는 없을 것이다.(라고 나만 혼자 지레짐작해 본다.) 설마, 이것도 나한테만 해당되는 일인가?
나도 결혼 초에는 시어머니가 주신 반찬을 무조건 좋다고 다 받아와서(혹은 그 성의를 생각해 차마 거절하지 못해서) 아까운 그 반찬들이 요단강으로 건넌 적이 더러 있었다고 지금에 와서 양심고백 하는 바이다. (부디 이 글이 시어머니께 발각되지 않기를. 만에 하나 발각되더라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그러니까 나의 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끈질긴 '선질문 후작업'은 다 내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엄마 말마따나 큰 새언니가 야멸치게 시어머니의 반찬을 몽땅 갖다 버려버리지는 않겠지만(경우에 따라 상하거나 못 먹게 되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왕이면 언니 의사를 먼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엄마는 좀처럼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엄마 말씀은
"느이 언니는 너랑은 다르다."
일종의 그런 마음이신 거다.
아니, 내가 뭘 어쨌기에?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거람?
그저 엄마는 큰며느리는 뭔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장 새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언니, 속보야! 엄마가 언니 깍두기 담가 주신대. 먹을 거유 안 먹을 거유? 김치 가져가면 냉장고에 들어갈 자리는 있어?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
라고 오지랖을 펄럭거릴 수는 없었다.
자고로 시누이가 너무 나서면 안 되는 법이니까.
결국 나는 무 두 개를 얼마 전에 사다 드렸다.
그러면서 또 굳이 한마디 했다.
"언니한테 물어보고 하라니깐."
엄마는 내 말에는 콧방귀도 안 뀌시고 벌써부터 묵묵히 보따리를 싸고 계셨다.
"고춧가루 새것인디 이거 언니 주고, 쌀도 좀 찧어 놓고, 깨도 언니 줄 거 다 볶아 놨고."
그렇다.
엄마가 오매불망 큰며느리를 기다리는 이유는 다 퍼주기 위해서였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몰아주기'라고 한다지 아마?
이거, 이거 반칙 아니야 엄마?
두 며느리가 안 오는 틈을 타서 맏며느리에게 다 몰아줘버리다니!
이것도 엄마가 다 계획하신 건가?
(부디 이 글이, 특이 이 부분이 엄마의 둘째, 막내 며느리에게 발각되지 않기를.)
"다른 며느리들은 (안 오니까) 소용없고, 다 언니 오믄 줘야쓰겄다. 너는 참기름 있냐?"
"아직 남았어."
"그라믄 '이것도' 참기름 '한 병 더' 줘야쓰겄다."
딸의 몫까지 맏며느리에게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저러다가 큰 오빠네가 안 온다고 하면 어쩐담?
"인자 고구마나 캐러 가야쓰겄다."
"나중에 추석 끝나면 내가 캐러 올 테니까 놔둬. 일 하지 말라고 하는데 왜 자꾸 일을 만들어서 해?"
"캐놨다가 느이 언니 오믄 줘야제."
"쭈그리고 앉아서 일하면 안 좋다고 했잖아. 오빠 오면 오빠랑 애들한테 캐라고 하면 되지."
"지금 캐 놔야 후숙 돼서 집에 가믄 바로 쪄 먹을 거 아니냐."
"하루 이틀 늦게 캔다고 무슨 일 안 난다니까!"
"너는 나중에 니가 캐서 갖다 먹어라. 이것은 다~ 언니 몫이다."
그날도 딸은 밀려났다.
밀려나도 한~참을 밀려났다.
언니는 좋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