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면직 취소자 1호는 될 수 없어, 절대!
< 사진 임자= 글임자 >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놈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며 들어오는 법은 없다고.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중(103쪽)-
나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눈앞에서 똑바로 걸어와 앞통수를 쳐도 당황스러울 판에 뒤에서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머리에서 번개가 번쩍할 만큼, 눈앞이 아찔해져 몸이 휘청일 만큼 강하게 남편의 뒤통수를 후려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뒤통수치는 나는 이미 온몸에 힘이 다 빠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는 걸 진심으로 그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남편은 처음에 내가 의원면직을 입에 담았을 때부터 그 주말 동안 내내 반대가 심했었다.
그러다가 워낙 내 의지가 강했고, 내 몸도 몸이거니와 아이들 생각에 결국엔 내 결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래도 자식은 친엄마가 살아서 키워야 하지 않겠어?"
라는 내 말에 그도 부모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던가 보다.
그럼에도 중간중간(아직 사직서는 공식적으로 다 처리가 되기 전) 나보고 그런 말을 했었다.
자꾸 깜빡깜빡하는 나의 기억력을 자극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나?
"지금이라도 가서 취소해 달라고 할 생각은 없어?"
"없어."
"아직도 안 늦었어."
"아니, 다 끝났어."
"아직 결재 안 났을 거야. 혹시 미련이 남으면 지금이라도 가서 취소해 달라고 해."
"그럴 생각 전혀 없어."
다른 부부도 이렇게 힘들게 의원면직 과정을 겪을까?
다른 이의 글을 보면 의외로 배우자가 흔쾌히 받아들였다고도 했고, 또 다른 이는 구구절절 상세히 기록만 하지 않았을 뿐 나보다 더 우여곡절이 있었을 수도 있다.
원래 내가 처한 환경이 제일 억울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더라, 살다 보면.
사람이라면 이기적으로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제일 고생한 것 같고, 내가 제일 힘들게 사는 것 같고, 나만 숨통이 조여 온다고 느끼는 그런 때 말이다.
남편 말마따나 내가 아차 싶어서 정신이 퍼뜩 들어서 '취소해 주세요, 제발~'이랬다면,
난 또 '의원면직 취소자 1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1호는 이제 그만.
그만하자 이제.
애꿎은 인사 담당자만 고생시키는 일.
"자꾸 그런 말을 계속하는 이유가 뭐야?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지."
"난 그냥 혹시라도 자기가 나중에 후회할까 봐 그러는 거지.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미련이 남으면 얼른 가서 취소하라고. 결재 나기 전에."
"지금은 후회 같은 거 안 할 것 같지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 시간이 많이 지나서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그땐 내 과보를 받을래 그냥. 정말 후회를 할지 안 할지 모르는 일이고, 지금 내 상황만으로도 머리 아픈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만약 진짜 후회된다면 지금이라도 가서 취소해 달라고 사정해 봐. 무릎이라도 꿇고."
"무릎까지 꿇어야 되나?"
"의원면직 인사발령 결재 다 나버리면 진짜 그땐 가서 울고불고 매달려도 소용없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무릎 꿇고 아무리 사정해도 소용없다니까."
"난 그 바짓가랑이 안 잡고 싶어. 잡고 싶은 사람이 가서 잡아."
남의 집 남자, 그것도 한 번 밖에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어디 가서 만나더라도 누군지 얼굴도 기억 못 할 사람을, 대관절 내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져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설사 남편 말처럼 금방 후회가 밀려와 어떻게든지 없었던 일로, 이전으로 상황을 돌리고 싶다면 찾아가서 정중히 부탁을 하면 되는 거지.
되든 안 되는 정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굳이 울며불며 무릎까지 꿇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린다?
그럴 거였으면 아예 시작도 안 했을 거란 내 얘기는 도대체 몇 번이나 더 남편에게 재방송해줘야 남편이 그만할까.
남편은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이 남아서 자꾸 나에게 저런 말들을 계속하는 건지, 정말 한 두 번도 아니고 도가 지나치다.
'증거자료 9'로 채택한다.
하지만 잠시 그런 상황을 떠올리자 너무나도 우스웠다.
마흔 살도 넘은 사람이 이제 공직생활 1,2년 한 사람도 아니고 철없는 애들처럼, 생각도 안 하고 사는 애들처럼 '의원면직하겠다 제발 빨리 처리해 주시라' 하면서 바쁜 사람한테 재촉할 땐 언제고, 며칠 만에 '마음이 바뀌었으니 미안하지만 없던 일로 해주시라'라고 이러는 것도 얼마나 우스운 일이냔 말이다.
만약(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다시 일을 한다고 치자.
그런 내 꼴이 또 얼마나 우스울까나.
"난 자기가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야. 나중에라도 후회할까 봐."
"왜 내가 후회할 거라고만 생각해? 후회 안 할 수도 있잖아. 할지 안 할지는 아무도 몰라. 아직 닥치지도 않았는데 왜 자꾸 후회할 거라고만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꼭 후회하기를 바라는 사람같이 왜 그래 진짜?"
"내가 보기엔 이성적으로 판단 못하고 너무 감정적으로 그러는 것 같아서 그래."
"내가 한 두 살 먹은 어린애야? 그리고 공무원이란 직업을 그만두는 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야? 아니잖아. 나도 시험 합격하려고 투자한 시간이 있어. 수험 생활하면서 포기한 것들도 많고. 난 충분히 신중히 생각했다고 몇 번이나 말해? 그냥 내가 일을 그만두는 게 싫은 거지? 맞벌이면 좋겠지? 그런 거 아냐?"
"아니야, 그런 건. 그래도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생각을 잘해보라는 거지."
그는 나보고 감정적이라 하고, 나는 내가 충분히 이성적이라 한다.
부부 맞구나.
남편은 저 모든 것이 농담이었다고 너무나 쉽게 내게 말해버린다.
나는 그 농담 안에 서슬 파란 칼날이 꽂혀 있다는 걸 잘 안다.
아니 느낀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이다.
그런 건 느낌으로 아는 거다.
뾰족한 칼날 위로 두루뭉술 농담이란 치마를 두르고 내게 계속 펄럭이고 있는 것을 잘 안다.
어쩌면 자포자기하게 된, 낙심한 남편의 당시 마음을 그렇게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나보고 알아달라고, 그 마음을.
나도 모르는 건 아니다.
"내가 공무원이어서 나랑 결혼한 거야?"
"그건 아니지."
"그럼 내가 공무원이 아니었어도 결혼을 했을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솔직히 내가 일을 그만둔다고 할 때부터 그것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래. 전엔 내가 일을 안 해도 괜찮다고 했잖아."
내가 너무 순진하게 그 말을 믿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결혼 초에 나보고 내가 일을 안 하더라도 아이들이라도 집에서 잘 키우고 살림 잘하면 그게 돈 버는 거라고 그는 말했었지.
내가 그 말을 너무 진지하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나 보다.
과연 그게 진짜 남편의 진심이기나 했을까.
"나도 앞으로 자기 혼자 일할 거 생각하면 힘들 거란 거 알아. 나도 일 해 본 사람인데 직장생활 힘들다는 거 모르겠어? 남들은 공무원이 편한 줄 알지만 그것도 아닌 거 잘 알아. 자기도 진짜 나중에 너무너무 힘들거나 도저히 힘이 없어서 쓰러질 것 같으면 그때 의원면직한다고 해도 난 뭐라 안 해. 본인이 못하겠다면 아무도 강요할 수 없는 일이고, 공무원 안 한다고 당장 땅이 꺼지는 것도 아니잖아."
진심이다.
남편도 예전에 국가직 의원면직을 할 때 도저히 못하겠다고 그만두겠다고 나보고 그랬을 때 나도 처음엔 섣불리 결정한 줄 오해하고 반대했지만 금방 수긍했다.
남들은 아무리 좋다 좋다 해도 당사자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남편도 한편으로는 공무원이 전부는 아니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서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한때는,
"20년만 하고 그만할까?"
이렇게 둘이 종종 얘기하던 때도 있었다.
어떤 직업이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크게 부귀영화 바라지 않고, 많은 욕심부리지 않고 건강히만 살 수 있다면, 혹 남편이 중간에 일을 그만두겠다고 한다 해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는 이미 다했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일이 이젠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나도 그만뒀면서 남편보고는 막무가내로 그만두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사람도 의원면직해 봤던 사람이니까 내 기분 잘 알겠지.
정말 알 수 없는 인생이로구나.
인생도 알 수 없고 더더군다나 남편의 마음 그 아리송한 것도 아내는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