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머님, 그래서 저 공무원 퇴직했어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요

by 글임자
22. 6. 25.

인사 담당자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면직 통지 공문 기안문이 작성도 되기 전에 친정에는 곧바로 내가 의원면직을 한다는 사실을 알렸고 다음은 시가에 알릴 차례다.


남편은 내가 일을 그만둔다는 사실을 우리 부모님께는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알리려고 했던 때와는 대조되게 시가 부모님께는 천천히 나중에 알려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고, 미루면 괜히 신경 쓰일 것 같았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미루지 말고 얼른 해버리는 성미인 나는 얼른 그 사실을 얘기해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자기가 육아 휴직했다는 말도 시가에는 못 하게 했다.


"못 할 말은 아니잖아. 뜬금없이 전화해서 아들이 육아 휴직했어요 이러겠단 것도 아니고, 뭐 얘기하다가 말이 나올 수도 있는 거지. 우리 집에는 나 그만뒀다고 빨리 말하라고 그렇게 재촉하더니 왜 그래?"

"얘기하면 걱정하시니까 그렇지."

"뭘 걱정해?"

"일 안 하고 휴직했다고."

"육아 휴직한 게 걱정할 일인가? 난 이해가 안 된다. 잘했다고 할 수도 있는 거지."

"그래도 하지 마."


도대체 뭘 걱정한다고 본인이 지레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다.

절대 아들이 휴직했다는 사실을 집에서는 알아선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어쨌는지 그냥 휴직이 끝날 때까지만 버텨 보겠다는 건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10년도 더 오래전에 결혼하고 일주일 만에 아들이 국가직 의원면직을 해버렸는데 그걸 숨기고 거짓말로 '휴직'을 했다고 둘러댔을 때 그 말을 듣고 어머님이 밤에 잠을 못 주무셨다고 한 그 말 때문에 그런가 싶기도 했다.

그 말은 나에게만 하셨었는데 남편이 들었으려나?

육아휴직 몇 개월 한 거 뭐 그리 대수라고, 그런 건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닌데 같이 사는 사람은 나인데 어머님이 걱정이시라니.


그러고 보니 전에 남편이 이런 말 한 적이 있다.

"엄마한테 육아 휴직할까 말했더니, 엄마가 '남자가 할 일이 따로 있고 여자가 따로 할 일이 있지' 이러시더라."

라면서 아들의 육아휴직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3년 육아 휴직한다고 했을 때는 기뻐하기조차 하셨던 일이 생생한데 말이다.

물론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여자가 따로 할 일이라면 출산? 그거 말고는 남자고 여자고 따로 할 일이 뭐 또 있었나? 내가 모르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거니까.

그런 걸로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다.


내가 일을 그만두고 직업 없는 사람으로 신분이 바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 시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통화가 된 김에 내 신상 변화를 알려야겠다 싶었다.

남편이 언제 통화하면서 내가 몸이 안 좋다고 했었나 보다.

그래서 전화를 하셨나 싶었다.

어머님이 너무너무 걱정이 되신단다.

아버님도 며느리가 몸이 아프다 해서 너무너무 걱정이 되신단다.

도대체 남편이 어떻게 말했길래 두 분이 심각해져서 저렇게 걱정만 하고 계실까.

적당히 말씀드리면 될 것을.

상황에 따라서 곧이곧대로 전달하기보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덜 걱정하게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것도 부모님이 걱정하는 상황을 제일 걱정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말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느닷없이 멀쩡한 줄로만 알았던 며느리가, 직장 생활 잘하는 줄 알았던 며느리가, 자식이 둘이나 있는 며느리가 아프다고 했으니 얼마나 놀라셨겠는가 말이다.

하긴 아무리 부모라도 다 말하지 못한 사연들이 많고 많은 거지.

부모는 내 자식이니까 내가 내 자식을 잘 안다고 하지만 그건 착각일 때가 많다.

옛날 어느 한 기억 속에서만일 때도 많다.

자식은 이미 다 컸고 함께 생활하지 않는 이상 모르는 거다.

그나마 같이 사는 사람들이 조금 알 뿐이다.

자식에 대해 잘 안다고 너무 자만할 일도 아니요, 말 안 해도 부모니까 다 알아주겠거니 믿을 것도 아니더라.


"몸이 안 좋다던데, 어디가 얼마나 안 좋냐?"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관리 잘하면 돼요."

"아니 어디가 아프길래 그래? 너 아프다고 해서 우리가 걱정이 돼서 전화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 상황에서

"큰일 났어요 어머님. 온몸이 성한 데가 없어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예상과는 달리, 우리 집과는 달리 너무 과민 반응하시는 거 아닌가도 싶었다.


"아프면 쉬어야지. 그렇게 안 좋아서 어떻게 일 나갈래? 다 낫고 나가야지."

그래도 며느리가 일은 계속했으면 싶으신 건가?

일을 나가긴 나가되 다 낫고?

아니, 내가 그만둘 거라고는 생각을 전혀 못하셨겠지.

대부분 사람들은 공무원은 한 번 시작하면 정년보장이 되니까 정년 다 채워서 퇴직할 때까지 일할 거라고 생각들 하니까.

평소에 어머님은

"너 일하면서 애들 키우느라 고생하는 거 다 안다. 여기 일은 신경 안 써도 된다."

하시던 분이다.

내가 직업을 갖고 있는 며느리라는 점에 후한 점수를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쭉 받아왔다.


"저 일 그만뒀어요."

"응? 그게 무슨 말이냐?"

"그래서 저 공무원 퇴직했어요, 어머님. 이 몸 가지고는 일도 계속 못하겠고, 아이들 뒷바라지도 제대로 못하겠더라고요. 일이고 살림이고 둘 다 잘 안될 것 같아서요. 애들이라도 챙기고 뒷바라지하면서 몸 좀 관리하려고요. 애들만이라도 건지게요."

"응... 그래."

"지금은 좀 나아요. 더 나아지겠죠."

"그래 잘했다. 건강이 우선이지. 잘했다. 잘했어."

어머님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1초, 2초, 3초.


"아니,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둬? 어떻게 들어간 덴데? 앞으로 우리 아들 혼자 벌어서 어떻게 산다고 일을 그만둬? 요즘같이 힘든 때에 둘이 같이 벌어야지."

설마 저렇게 말하는 시어머니가 세상에 있을까.

아마 있을지도 모르겠다.

속마음으로는.


말씀만이라도 고마웠다.

사실 시가에서 나의 공무원 퇴직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머님과 통화를 하기 전까지는.

의외로 시부모님은 담담히 넘어가셨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 몰라, 어머님 그날 나랑 통화하고 나서 밤새 못 주무셨는지.

'얘네들은 어째 돌아가면서 공무원을 그만두고 야단이다냐' 이러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1월에 내가 퇴직하고 언제 봄에 한 번 시가에 갔을 때도 별말씀은 없으셨다.

그래도 얼굴에 근심이 보이긴 했다.

내가 그리 봐서 그럴 수도 있다.

말씀은 안 하셨어도 속은 상했을 것이다.

아픈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이젠 아들이 혼자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현실에, 아들이 안쓰러운 마음에, 며느리 건강 걱정에......

하지만 가정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꼭 경제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만 따지는 그런 의미만은 아닐 거라 생각하니까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사실, 의원면직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남편과는 경제적인 면에서 가장 갈등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른 집 여자들은 직장 생활도 잘하고 아이들도 다 잘 키우더라."

밥 먹듯이 남편이 하는 말을 듣고 들어왔다.

나 혼자 또 가만 생각해 본다.

남편이 어느 정도 많은 것을 같이 해 주겠지.

어느 한 사람한테 일방적으로 그 짐을 다 지워서 한쪽이 폭삭 내려앉게 하지는 않겠지.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결혼 생활에 있어서 '같이' 하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어지게 되면 그건 너무 가혹하다, 상대 배우자에게는.


나도 이런 말 할 줄은 안다.

"다른 집 남자들은 같이 맞벌이하면서도 가사 분담도 다 하고 청소기도 돌리고 세탁기도 돌리고 어쩔 땐 밥도 하고 주말엔 밥도 차린다더라."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하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상상이 가질 않았다. 맞벌이니까 당연하게 같이 가사분담을 하는 일 말이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었으므로.

예전에 시가에 갔을 때 시누이의 남편이 아침에 세탁기를 돌렸단 말에 내가 호들갑을 떨며

"아니, 형님, 집에서 세탁기를 돌리는 남편이 다 있어요 세상에? 남의 집 남편은 그런가 보죠? 말로만 들었지 그런 남편이 진짜로 있는 줄 정말 몰랐네요. 우리 집 남편은 전혀 안 하던데요."

이러면서 일부러 과하게 대응했던 적이 있었다.

시가에선 남편이 꽤나 적극적으로 가사를 분담하고 있다고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남들은 모른다.

같이 사는 사람만 안다.


하지만 또 다들 저렇게 살지는 않을 테지.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직장 생활도 육아도 살림도 뭐든 다 잘하는 그런 여자는 그런 여자고,

난 이미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내 형편에 맞게 그냥 살고 싶을 뿐이다.

무리하게 애쓰는 것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

애쓰고 사는 게 힘들더라, 정말로.

이젠 굳이 뭘 그렇게 애쓰면서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 싶다.


어쨌거나 시부모님은 나의 퇴직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씀도 안 하시고 더 이상 캐묻지도 않으시고 너무 싱겁게 넘어간 느낌도 약간은 있다.

내 의원면직에 대한 반응 중에서 가장 건조했었달까.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저런 반응이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저런 반응을 은근히 기대했던 건지도.


어머님과 통화가 끝나자 곧이어 둘째 시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에는 1년에 한 번이나 통화할까 말까 하는 사이다.

아마 어머님께 무슨 말을 들었겠지?

좀 전의 어머님과의 통화를 복사해서 붙여 넣기 했더니,

"잘했어, 잘했어. 건강이 제일이지 그럼."

하면서 어머님의 말씀을 복사해서 붙여 넣는 둘째 시누이다.


철없는 동생 데리고 산다고 고생이 많다는 말을 자주 하던 시누이와 나는 동갑이다.

지금 동생이랑 같이 살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신기하네.

그래서 그런지 어쩔 땐 친구랑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시누이 입장에선 어쩐지 전혀 모르겠지만), 자주 통화하진 않지만 어쩌다 통화하면 수다 시간이 길어질 때도 있다.


이렇게 시가에 나의 환경 변화에 대해 모두 알리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풀기 어려운 숙제를 미루지 않고 제 때 해치운 느낌이다.

공무원 아내를 둔 남편만 '안된다, 안된다.'였고,

공무원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는 '잘했다 잘했어'였다.


keyword
이전 13화나 의원면직했어 엄마, 공무원 그만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