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상담 일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인호 Dec 02. 2023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상담 일지 ⑦

10월 이후로 상담 일지를 안 썼다. 물론 상담은 한 주도 빠짐없이 꾸준히 받고 있다. 그때그때 기록해두어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다. 며칠 뒤에 쓰려고 하면 막상 별로 쓸 내용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희석되거나 왜곡되고, 증발한다.


이제 선생님은 나와의 상담(대화)을 즐기시는 게 분명하다. 처음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매주 수다 떨러 오겠다는 나의 말을 반신반의하셨으나, 5개월 동안 매주 찾아와 사소한 일상부터 고상한 철학까지 경계 없이 실컷 떠들다 가는 나를 보고 이내 확신을 얻으신 모양이다. 한 편으로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 과하게 철학적인 주제들로 선생님을 괴롭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저 나는 사소한 것부터 부끄러운 것, 그리고 괴상한 것까지 전부 속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비밀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곳에서 나눈 대화는 전부 이 곳에 묻고 가리라. — 그러고 보니 나는 선생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다. 이름도 성도 모른다. 이름 석(넉)자가 박힌 명찰이 가슴 한 켠에 떡하니 붙어 있는데도 말이다. —


요즘은 내 속의 존재하는 수많은 나를 마주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페르소나와 그림자가 만나는 시간이랄까. 이 작업은 꽤나 고통스럽다. 꽁꽁 숨겨놓고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나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던, 만나고 싶지 않은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쩔 때 선생님은 마치 무당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연기도 하시고, 나 대신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소리도 지르셨다. 또 어떤 때는 그녀가 마치 최면술사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응당 나이를 먹었으니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들이 아직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때 그 감정과 상황에 여전히 묶인 채로. 평소에는 깊은 곳에 쇠사슬로 속박되어 있지만, 본체가 약해지면 속박은 풀리고 녀석들은 모습을 드러낸다. 현재가 약해지면 과거는 힘이 세진다.


왠지 매일, 아니 평생을 조절하면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다. 누군가 나타나지 않게. 헐크의 브루스 배너 박사는 사실 언제나 화가 나있지 않은가.


모쪼록 수많은 노인호와 대화를 통해 완만한 합의에 이르기를 소망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처방전: 휴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