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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칠도씨 Jul 20. 2023

Ready to Take Off (1)

2022 제8회 항공문학상 응모작품

    다른 이들에게는 남으면 하는 여가인 것이, 나에게는 없으면 못 사는 절실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 대상이 비행이었다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항공사 직원인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비행기를 가까이하고 살아왔다. 관악산 꼭대기를 지나 랜딩기어를 내리는 소리가 매시간 들리는 동네에 평생 살기도 했으니, 비행기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지 싶다. 하지만 여행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떠난 배낭여행에서 혼자인 외로움과 자유로움, 그리고 이들에 오롯이 맞서야 하는 공포와 기쁨의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겨우 성인의 문턱을 지난 무렵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인생에서 피해 갈 수 없을 통과의례를 겪겠지만, 갓 고등학생을 벗어난 과거의 나는 너무도 순진했고 물렁했다. 갑자기 벼락처럼 떨어지는 불행을 정신없이 피하러 잡히는 대로 잡은 것이 뜬금없게도 여행이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였던 것 같다. 동유럽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무작정 가고 싶었다. 프라하에서 시작해 버스로 부다페스트까지 이동하고 다시 버스로 비엔나까지 간 뒤 기차로 할슈타트를 들르는 일정이었다. 반쯤은 얼이 빠진 상태로 알지도 못하는 도시의 호스텔을 예약하고 기차를 예약했다. 여행 날짜까지 착각한 것을 바로 출국 전날에 알아 얼렁뚱땅 떠난 그날은 여행을 향한 내 오랜 사랑이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잊을 수 없는 첫 배낭여행 이후로 열심히도 여행을 다녔다. 20대의 절반을 여행을 꿈꾸거나, 여행을 준비하거나, 여행을 하면서 보냈다. 놀러 다니는 일에 정신이 팔렸다고 눈칫밥을 먹을지언정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여행을 통해 경험한 다른 여러 나라들이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 아닌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이 나를 숨 쉬게 했다. 이런 내게 코로나로 봉쇄되었던 2년은 수감의 시간이었다. 세계로 날아가는 통로는 닫혔고 대학 수업은 온라인으로 전환되어 매일을 좁은 방에서 갇혀 지냈다. 기약을 모르는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내 안의 불꽃은 빛을 잃었다. 졸업식마저 영상으로 대체되어 학교를 떠난다는 감흥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졌다. 대학생활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졸업식이 있던 2월은 여러모로 절망이 커서, 많은 인문대 졸업생들이 그렇듯이 깜깜한 미래만을 고민하며 헐렁하게 보냈다. 봄이 서서히 찾아오던 3월에는 죽어있던 꽃과 나무가 분주히 새 삶을 준비하듯 멈춰있던 내 삶의 시침도 그동안 멈춘 것을 보상하듯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린 일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루 이틀 만에 차례로 걸려 격리 기간이 길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몸살감기를 떠올리게 하는 미열에 시달리면서도 내 마음속에는 희망이 차올랐다. 자연면역을 얻었으니 코로나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이 전염병으로 인해 2년간 박탈당했던 여행이라는 피난처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 갑자기 이상한 힘이 솟아나 외교부와 여러 나라의 출입국 사이트를 조사해 보았다. 그러던 중에 발표된 '40일 이내 단순재검출 반영 검사 면제 방침'은 운명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코로나 확진 한 달 뒤인 4월 초에 귀국하게 되는 일정이라면, 입국 시 검사가 필요 없으니 입국을 못할 불안 없이 여행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었다.

    여행을 갈까, 말까, 갈까, 말까... 혹여나 간다 해도 잘할 수 있을까 등을 걱정하느라 며칠간 잠을 못 잤다. 피곤에 절어 겨우 잠이 들어도 설핏 의식이 있을 정도로 옅게 들거나 불안이 가득한 악몽을 끊임없이 꿨다. 예전엔 잘만 떠났는데, 2년간 갇혀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된 걸까? 엄마는 이런 날 보고 나이가 든 것이라 말했다. 위험한 선택을 피하는 어른. 한국에 남아있는 것이 몸도 마음도 편한 선택지라서 자꾸 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가지 못하면 괴로운 후회의 시간이 이어질 것도 알았다. 격리 해제 후 항원검사에서 음성 결과를 받으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코로나에 걸렸고, 아팠고, 회복했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덜어주었다. 다음날 아침 프랑스 파리의 숙소를 예약하면서 여행이 확정됐다. 출국일로부터 나흘 전이었다.

    긴박한 일정이지만 그 사이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열심히 준비했다. 해외사용이 가능한 체크카드를 발급하고, 방구석에 잠들어있던 비상용 유로 현금을 챙기고, 옷가지와 비상식량을 챙기자 이제야 이전에 느껴본 여행의 설렘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휴면회원으로 지냈던 여행 카페에 수시로 들어가 실시간 정보를 체크하고 ‘파리’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게시물을 탐독했다. 이렇게 열정을 느껴본 게 얼마만일까. 즐거웠던 나흘이 빠르게 흘러 출국하는 날이 되었다.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오니 잘못이라도 한 듯 숨고 싶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서였기도 했지만,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는 여행을 떠나게 됐다는 이유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과거에 종종 보이던 캐리어족은 자취를 감추어 바퀴가 돌돌거리는 소리마저 생경했다.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조심하며 인천공항에 가는 공항철도 플랫폼에 왔다. 열차도 기존 지하철이 아니라 기차 같은 형태의 열차로 바뀌어 있었다. 공항까지 가는 승객이 별로 없어서인 걸까. 남은 자리가 역방향밖에 없어 약간 메슥거렸다. 그런 중에도 제대로 준비한 게 맞는지 불안해 대한항공 홈페이지를 들어가 프랑스와 한국의 출입국 규정을 조사하고 다른 여행객의 후기를 찾았다. 아빠가 카카오톡으로 모바일 탑승권을 보내줬다. 늘 스탠바이용 카운터에 가서 종이 탑승권을 보여줬던 터라 이런 신식 과정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뀐 것 같다.

    다시 찾은 인천공항은 거의 그대로였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다. 이 안을 가득 채우던 사람과 활기가 사라져 있었다. 지하철 역을 빠져나와 게이트와 인포메이션을 보니 세트장에라도 온 듯 아무도 없었다. 가끔씩 지나다니는 공항 직원은 한가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어지는 지하상가는 문을 닫은 식당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문을 연 식당에도 사람이 없었다. 출발층인 3층에 올라가러 도착층을 지날 때도 방역교통망을 안내하는 입간판만이 조용히 빈 공항을 지키고 있었다. 귀국하는 4월에는 자유로이 대중교통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3층에 도착하니 체크인 시간을 맞은 대한항공 카운터에만 약간 사람이 있고 그나마도 줄이 길지는 않았다. 알록달록한 깃발과 등산복을 입은 중년 손님들로 북적이던 여행사 카운터도 이제는 텅 비어있었다. 쓸쓸했다. 그들은 지금 다 어디 갔을까?


    몇 년 간 하늘길이 막힌 경험은 처음이기에 여러 번 해보았던 체크인도 겁이 났다. 탑승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는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카운터로 걸어갔다.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절차는 간단하게 끝났다. 여권과 카카오톡 탑승권, 코로나 관련 서류를 보여주고 직원이 살펴본 것이 전부였다. 캐리어까지 수화물로 붙이고 가벼운 에코백 하나만 덩그러니 남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가벼운 차림으로 지구 반대편 나라에 간다니 불안해서 뭐라도 더 집어넣고 싶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인천공항을 다시 둘러보고 보안검색대에 들어갔다. 역시나 줄이 없어 보안검색도 빨리 끝났다. 면세점은 더 가관이었다. 텅 빈 복도는 내 발걸음 소리마저 튕겨내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게이트 안 유일한 편의점을 찾아내서 보리차를 사 왔다. 기내에서 목마른 사슴처럼 계속 물 달라고 하기가 민망할 것 같았다. 가야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가보니 한복까지 차려입고 공연을 하고 있어 잠시 서서 들었다. 관객은 나 한 명. 누군가는 그 연주를 고맙게 감상했다는 사실이 연주자에게 전해지길 바랐다. 어느덧 샤를 드골 공항행 비행기의 탑승수속이 시작되었다.

    사실 처음 가는 공항도 아니었다. 생애 첫 배낭여행을 떠났던 때, 프라하 직항 노선이 풀부킹되어 어쩔 수 없이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경유하는 차선책을 택했다. 원래 계획에서 틀어져 자정 가까운 늦은 시간에 도착하게 되고 몸은 배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 건 행운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을 만났기 때문이다. 녹초가 되어 환승한 두 번째 비행기가 떠오를 때, 쏟아지는 잠에 혼곤하던 내 눈을 잡아끈 빛이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드니 등대처럼 빛을 휘날리는 에펠탑과 격자형의 도로로 찬란한 파리의 밤이 보였다.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빠른 비행기의 속력에 찰나처럼 스쳐간 풍경은 꼭 이곳에 다시 와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내 결심을 5년 넘게 기다려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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