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십칠도씨 Jul 26. 2023

개와 늑대의 시간, 지금 이 순간

    사진가들이 흔히 매직 아워라고 부르는 황혼이 지나면, 맑은 한낮의 푸름에다 농도만 훨씬 진하게 만든 것 같은 푸르고 어두운 하늘이 나타난다. 프랑스인들은 그 찰나를 일러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저 앞에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형상이 나를 도우러 올 개일지, 나를 해치러 올 늑대일지 구분이 안 가는 시간. 새로운 관문을 앞두고 있는 요즘 나의 심정이 그와 비슷하다. 이것은 기대감보다는 불안에 가깝다. 대학원이라는 곳이 나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다리인지, 더 추락할 수도 없는 무저갱으로 떨어뜨릴 절벽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가는 시간이다.

    요즘 나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가장 유명한 넘버인 "지금 이 순간"을 반복재생하고 있다. 중요한 시기에는 디에게시스 안의 인물이 비장한 심정으로 부르는 노래를 듣게 된다. 작년 가을에 거쳤던 입사라는 또 다른 입문의식에는 비슷하지만 다른 노래를 들었다. 회사 첫 출근 전날, 내일을 바라면서도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운 마음이 <레미제라블>의 "one day more"라는 넘버와 맞아떨어졌다. 내 개인의 역사로 보면 첫 입사라는 사건은 프랑스혁명만큼이나 대단했던 것 같다.

    가격이 워낙 비싸 많은 작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웅장함과 풍부한 감정을 겸비한 뮤지컬 음악을 좋아한다. 그래서 때로는 스토리조차 모르는 뮤지컬의 넘버도 찾아 듣곤 한다. 그 시작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음악시간의 첫 제로 내 인생곡을 발표할 때 자랑스레 홍광호 배우가 열린음악회에서 부른 "지금 이 순간"재생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평소에 기억 속 깊은 곳에 숨어있다가, 수능을 본 직후라든가, 대학교 입학 면접을 보기 전날밤이라든가, 어느 때이든 인간승리를 해냈다고 생각되는 시점이나 인간승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불쑥불쑥 떠오르곤 했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나만의 꿈이 나만의 소원

이뤄질지 몰라 여기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말로는 뭐라 할 수 없는 이 순간

참아온 나날 힘겹던 날

다 사라져 간다 연기처럼 멀리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왔던 사슬을 벗어던진다

지금 내겐 확신만 있을 뿐

남은 건 이젠 승리뿐


그 많았던 비난과 고난을

떨치고 일어서

세상으로 부딪쳐 맞설 뿐


지금 이 순간 내 모든 걸

내 육신마저 내 영혼마저 다 걸고

던지리라 바치리라

애타게 찾던 절실한 소원을 위해


지금 이 순간 나만의 길

당신이 나를 버리고 저주하여도

내 마음속 깊이 간직한 꿈

간절한 기도 절실한 기도

신이여 허락하소서!


    한국어로 번안된 가사는 의역의 완벽한 예로 꼽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원어 가사는 자신의 실험으로 신에게까지 도전해보고 싶은 '지킬'심정에 충실했다면 한국어 가사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 오다 그 결실을 눈앞에 둔 모든 이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춘 것 같다. 그래서인지 "This is the Moment"를 들을 때는 주인공에게 예정된 비극으로 인해 숨길 수 없는 아슬아슬함이 느껴지지만 "지금 이 순간"을 들을 때는 그렇지 않다. 설렘으로 인한 두근거림과 역경을 이겨낸 짜릿함, 마침내 꿈을 이룬다는 환희만이 가득하다. (번안 버전은 '당신이 나를 버리고 저주하여도'만 살짝 개사하여 결혼식 축가로까지 쓰일 정도니 두 가사가 얼마나 다른 느낌인지 잘 알 수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미래에 겁이 나고 남들이 잘 가지 않는 좁은 비탈길까지 흘러온 인생이 한심해져 승리의 예감이 간절한 이때 다시 "지금 이 순간"의 가사를 끊임없이 흥얼거린다. 하지만 이것은 혼란을 가중시킨다. 나야말로 '지킬'이 아닐까? 재능을 과신하여 자기만족이란 최상급의 오만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파멸을 향해 제 발로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부르고 있는 이 노래가 불행의 서곡으로서의 "This is the Moment"인지 꿈을 향한 희망찬 "지금 이 순간"인지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 채, 더듬더듬 한 발짝씩 나아갈 뿐이다. 아마 내 앞에 놓인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알 수 있을 때에는 둘 중 어느 쪽이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고전문학의 개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