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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 이월 Apr 21. 2023

뉴욕에서 반드시 가야 하는 미술관이 있다면

- 뉴욕에서 만난 인생 풍경화

새벽부터 주룩주룩 비가 오는 날. 센트럴파크에 가려던 일정을 인자하고 푸근한 마음으로 다음으로 미루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뉴욕에서 한 달을 머물게 되면 궂은 날씨에도 얼굴 찡그릴 일이 없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강퍅해졌던 건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아주 당연한 이치에 새삼 놀란 척하며, 나는 날씨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는 여행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전 재산을 바쳐 시간을 돈으로 사고 나서는(애통하게도 내가 가진 돈으로는 겨우 한 달밖에 못 샀다) 아침 창문 앞에서 한숨을 쉬는 날이 없는 여행을 하게 됐다.


뉴욕에서 매일 일기를 써서 책으로 내겠단 꿈이 생겼고, 책을 팔아 여행하면서 쓴 돈을 메워보겠다는 더 거창한 꿈을 꾸며 출국했으나 여행을 시작한 뒤 금세 현실을 직시했다. 2년 동안 모은 돈을 여행에 다 쓰는 만큼 뭐라도 뽑아보자 생각했지만, 나는 여행을 위해 정년퇴직이 보장된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괜찮은 직장을 관두기는 했다) 차나 집을 팔지 않았으며 보호자 없이 혼자 떠나기에 어린 나이가 아닌 데다가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오지에 간 것도 아니며 아무도 도전하지 않는 일에 나선 것도 아니니 독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들에게 딱히 어필할 게 없는 한달살이란 걸 인정하고 책에 실을 사진을 찍기 위해 중고로 카메라를 그냥 숙소에 두고 나가기 시작했다.


남들에게 읽힐 여행도 아니면서, 2년 동안 모은 돈을 뉴욕에서 다 써버려도 괜찮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여행이었냐고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 날, 나는 미술관으로 향했다. 관광객에게 모마나 메트로폴리탄, 구겐하임처럼 우선순위의 미술관은 아니다. 내가 뉴욕에서 한 달을 살지 않았으면, 다른 관광지에 밀려 틀림없이 가지 않았을 곳.


미술관으로 들어서기 전에 입구에서 비에 젖은 삼단 우산을 탈탈 털었다. 약간의 황홀감이 맴돌았다. 와, 뉴욕에 한 달이나 있으니까 이런 미술관도 다 와보네. 내부 촬영이 금지된 미술관이라 다른 미술관들에 비해 작품 정보가 적었다. 그렇다는 건 노력하지 않으면 중요한 걸 놓칠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좋았다. 무지가 가장 정직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니까.


여행할 때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일부러 들르는 편이다. 예술 작품이나 미술사에 깊은 조예나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즐거워서 그런 거지만 어중간하게 아는 지식으로 작품을 보다 보면 내가 느낀 기분이나 감정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려는 강박에 시달릴 때가 있다. 왜 좋고 왜 싫은지 명확하게 정리하는 일은 불편하거나 어렵지는 않다. 다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잊게 된다는 게 문제지.


오늘만큼은 아는 만큼 보이는 세계에서 무지하게 있기로 했다. 여행할 때는 내가 아닌 것처럼 구는 날이 명백히 필요하다. 그러다 하루를 망치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거뜬히 웃어 넘길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을 꼭 하게 되니까.


그래, 바로 이런 경험. 한 작품을 보자마자 어쩐 일인지 눈물이 차올랐다. 대체 왜? 무척이나 황당했지만 왜 눈물이 나는지 이유를 구태여 찾지는 않았다. 눈물이 반드시 이유를 동반하는 건 아니니.


눈물이 먼저였고, 그 다음이 감상이었다. 마을에 소복이 내린 눈과 하늘의 색은 닮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부터 땅인지 구분이 됐다. 본래 눈을 좋아하지 않는데 눈밭이 내 시선을 붙잡아두었다. 삐쭉 솟은 마을의 첨탑을 보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때 지났던 작은 마을의 첨탑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호수인지 바다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물 위를 오가는 나룻배와 나룻배에 탄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저들이 낚시를 하러 떠나는 사람들인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사람인지 상상하다가 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잡아두는 그림을 그린 화가가 대체 누구지, 하고 그제야 작품의 제목과 화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름을 본 순간 나는 피식 웃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화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더군다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하나 없어 씁쓸한 기억으로 남은 2013년 지베르니 여행의 주인공이. 십 년 전, 못마땅한 얼굴로 지베르니를 떠나면서 불만족스러웠던 하루 때문에 모네를 좋아하는 마음이 변하는 게 아닌가 궁금했었는데 답이 명확하게 나왔다.


작품을 보자마자 눈물이 차올랐던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작품의 엽서를 사러 기념품숍에 들렀지만, 베퇴유의 겨울 엽서는 없었다. 빈손으로 미술관을 나왔다. 빈손이라서, 나는 다시 가야만 한다. 프릭 매디슨으로.


내 인생 풍경화가 모네의 다른 그림들에 비해 덜 유명해서, 내부 촬영 금지 미술관의 작품이라 인터넷에서 작품 사진을 자주 볼 수가 없어서, 인터넷에 나와 있는 작품은 눈앞에서 본 것과는 어쩐지 색감도 느낌도 달라서, 작품 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울게 되어서, 내가 울고 있음을 다른 이가 모를 만큼 고요한 미술관이었어서 나는 뉴욕을 떠나기도 전에 뉴욕에 다시 갈 것을 다짐했다.


십 년 전 첫 여행에서 생겨난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서 프릭 매디슨에 가야 했다고, 그러려면 뉴욕 한달살이는 불가피했다고, 한 달의 시간을 사기 위해 가진 돈을 아낌없이 내놓아야 했다며 마치 운명의 실타래를 꼭 쥔 사람처럼 황홀히 말하겠다. 오래된 질문 하나에 늦은 답을 내리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모은 돈을 뉴욕에서 다 써버려도 괜찮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여행이었다고.      





+ 이 글은 동생에게 베이비시터로 고용되어 일하고 있는 중에 썼다. 미래 계획 없이 아둔한 선택을 했다고 나를 질책할 뻔했으나, 조카를 봐주며 동생에게 월급을 받는 덕분에 빈 통장을 보고도 뉴욕 여행을 떠나길 잘했다고 위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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